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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근] 오동나무, 생을 다하다/정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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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7회 작성일 2025-05-30 17:03: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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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나무, 생을 다하다/정병근

토막 살인 영화에 나오는
발동기를 단 톱날이
오동나무의 밑둥치를 파고든다
이쪽 나이테에서 몸의 중심을 지나
반대편 나이테에 이르자
소처럼 한 번 울고 오동나무는 무너졌다

톱날이 뱉어낸 오동나무의 살과 피가
사방으로 튀며 화면을 흥건히 적시는 동안
아직 자신의 부음을 받지 못한 가지들은
쓰러진 후에도 여전히 그 넓고 푸른 이파리와
보랏빛 꽃들을 달고 있다

오동나무 더딘 죽음의 파문이
가지 끝에 다다르기까지는
몇 백 년 아니
몇 천 년이 걸릴지 모른다

몇 토막으로 잘린 오동나무의 몸은
누군가의 방에서 오랫동안 썩기 위해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다

너무 더딘 삶이었으므로
오동나무
지금부터 죽으러 간다

- 『번개를 치다』(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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