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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시창작 강의실에서/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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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5회 작성일 2025-04-14 14:51:3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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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 강의실에서/정일근

눈을 감고 시(詩)를 만들려 하지 마라
시는 허공에 짓는 집이 아니라
백지 위에 또박또박 그리는 설계도이니
네가 짓는 집의 투명한 설계도를 보여다오
죽은 시집 속에서 죽어버린 말들을 꺼내지 마라
사전 속의 미라 같은 말들을 펼치지 마라
시는 살아있는 동물이니 살려서 풀어놓아라
네 주머니 속에 함께 뒹구는 잡동사니처럼
네 몸에 남은 지독한 상처처럼
너의 시는 너와 함께 살아가는 너의 것이니
시큼하고 똥냄새가 나더라도 너의 냄새를 풍겨다오
어디에도 있는 것은 시가 아니라
어디에도 없는 것이 시이려니
말의 사원이 시라고 가르치는 늙은 첫장은 쭉 찢어버리고
그 사원에 너의 말들을 말처럼 뛰어다니게 하라
그중 제일 잘 뛰는 말들의 엉덩이를 때려
혈관 속에서 네 발굽으로 달리게 하라
시는 붉게 솟구치는 뜨거운 피려니
그 피에 펜을 적셔 노래하듯이 시를 써라
죽은 것들 벌떡벌떡 살아 쩌렁쩌렁 울리도록 하라
나를 죽이고 네가 세우는 깃발이 너의 영토이니
어미의 뱃속 찢고 나오는 한 마리 살무사가 되기 위해
베어라, 너의 시로 나의 시를 베어라

-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문학과지성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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