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밀물 무렵/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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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 무렵/최승호
해안도로를 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 너머로 흐린 바다가 보이고, 기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낚싯대를 멘 소년이 휘파람을 불며 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 갯지렁이들이 담긴 통이 들려 있었다. 여름인데 (물렁물렁하지 않고) 딱딱한 아스팔트를 건너 몇 걸음이면, 거기가 바로 바다였다. 물 빠진 바다에서 갯내가 풍겨왔다. 모처럼 보러 온 휴일(休日)의 바다에 별로 볼 것이 없었다. 나는 해안에 늘어선 횟집의 수족관들을 구경하느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책상처럼 높고 관처럼 비좁은 수족관들, 그 유리상자 속에 흑돔이며 낙지며 가오리들이 살아서 지느러미를 젓기도 하고 다리를 흐느적거리기도 하는 것을, 나는 별 식욕 없이 들려다보며 수족관 앞을 지나가곤 하였다. 무료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가느다란 똥을 끊어버리는 물고기들이 입과항문을 벙긋거리는 무료한 시간의 물거품들이, 또는 흡반투성이의 희멀건 다리를 바닥에 척 늘어뜨리고 졸음 겨운 눈을 뜨고 있는 낙지의 오후 네 시가, 또는 잠자는 늙은 부두노동자의 꿈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는 길밖에는 어떤 길도 보이지 않던 오후, 나는 다시 온 길을 걷고 있었다. 수족관의 흑돔들이 일제히 나를 뚫어지게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약속이나 한 듯, 줄을 선 수병(水兵)들처럼, 흑돔들은 긴장한 자세로 나를 내다보지는 않았었다. 아, 밀물이다. 밀물을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서 소리치며 낚싯대를 든 소년들이 뛰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때 나는 이해했다. 흑돔들이 뚫어지게 내다본 것은 내가 아니라, 밀물 드는 바다였는다는 것을 말이다.
- 『달맞이꽃에 대한 명상』(도서출판 세계사, 1993)
해안도로를 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 너머로 흐린 바다가 보이고, 기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낚싯대를 멘 소년이 휘파람을 불며 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 갯지렁이들이 담긴 통이 들려 있었다. 여름인데 (물렁물렁하지 않고) 딱딱한 아스팔트를 건너 몇 걸음이면, 거기가 바로 바다였다. 물 빠진 바다에서 갯내가 풍겨왔다. 모처럼 보러 온 휴일(休日)의 바다에 별로 볼 것이 없었다. 나는 해안에 늘어선 횟집의 수족관들을 구경하느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책상처럼 높고 관처럼 비좁은 수족관들, 그 유리상자 속에 흑돔이며 낙지며 가오리들이 살아서 지느러미를 젓기도 하고 다리를 흐느적거리기도 하는 것을, 나는 별 식욕 없이 들려다보며 수족관 앞을 지나가곤 하였다. 무료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가느다란 똥을 끊어버리는 물고기들이 입과항문을 벙긋거리는 무료한 시간의 물거품들이, 또는 흡반투성이의 희멀건 다리를 바닥에 척 늘어뜨리고 졸음 겨운 눈을 뜨고 있는 낙지의 오후 네 시가, 또는 잠자는 늙은 부두노동자의 꿈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는 길밖에는 어떤 길도 보이지 않던 오후, 나는 다시 온 길을 걷고 있었다. 수족관의 흑돔들이 일제히 나를 뚫어지게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약속이나 한 듯, 줄을 선 수병(水兵)들처럼, 흑돔들은 긴장한 자세로 나를 내다보지는 않았었다. 아, 밀물이다. 밀물을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서 소리치며 낚싯대를 든 소년들이 뛰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때 나는 이해했다. 흑돔들이 뚫어지게 내다본 것은 내가 아니라, 밀물 드는 바다였는다는 것을 말이다.
- 『달맞이꽃에 대한 명상』(도서출판 세계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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