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팥빙수 먹는 저녁/고두현
페이지 정보
본문
팥빙수 먹는 저녁/고두현
흰 눈가루처럼 백설기처럼
부드러운 얼음이 소복하게 쌓이는 밤
둥근 유리그릇 안에서 그대는
뽀얀 우유와 연한 오렌지 조각 어루만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풀고
팥고물처럼 우리 이렇게 달디단 눈빛으로
한 백 년쯤 녹아갈 수 있다면
오늘같이 더운 날
이마에 맺힌 땀방울 송글송글 닦아주며
달뜬 마음도 식혀주며
한술한술 서로 입에 넣어주다가
빈 그릇 밑바닥에 얼굴 비춰보면서
시원하지 참 시원하지 다독여주면서
한 그릇 더 시킬까 마음 써주면서
오순도순 손잡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 사각사각 눈 내리는 겨울밤까지
이 길 오래오래 이어지길 빌면서
내일 또 내일 내년 후 내년
이 시려 찬 것 더 못 먹는 날까지
손가락 걸고 자박자박
아름답게 늙어갔으면.
-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랜덤하우스중앙, 2005)
흰 눈가루처럼 백설기처럼
부드러운 얼음이 소복하게 쌓이는 밤
둥근 유리그릇 안에서 그대는
뽀얀 우유와 연한 오렌지 조각 어루만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풀고
팥고물처럼 우리 이렇게 달디단 눈빛으로
한 백 년쯤 녹아갈 수 있다면
오늘같이 더운 날
이마에 맺힌 땀방울 송글송글 닦아주며
달뜬 마음도 식혀주며
한술한술 서로 입에 넣어주다가
빈 그릇 밑바닥에 얼굴 비춰보면서
시원하지 참 시원하지 다독여주면서
한 그릇 더 시킬까 마음 써주면서
오순도순 손잡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 사각사각 눈 내리는 겨울밤까지
이 길 오래오래 이어지길 빌면서
내일 또 내일 내년 후 내년
이 시려 찬 것 더 못 먹는 날까지
손가락 걸고 자박자박
아름답게 늙어갔으면.
-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랜덤하우스중앙, 200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