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은] 고딕시대와 낭만주의자들/강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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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시대와 낭만주의자들/강성은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은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 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당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 속에서 입 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 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 웹진《문장》2008,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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