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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어두운 골목 붉은 등 하나/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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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5회 작성일 2025-05-22 19:09: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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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골목 붉은 등 하나/이병률

상가(喪家) 음식에서 착한 맛이 난다는 생각을 하는 데 오래
모르는 문상객들 틈에 앉아 눈 맞춰가며
그래도 먹어야 하는 일이 괜찮아진지 오래

조금 싸다가 한 며칠 먹으면 좋겠다 싶게
상가 음식은 이 세상 마지막 맛인 듯 맛나고
상가를 지키는 이들의 말소리는 생전에 가장 달고

배고프지 않았는데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 건지 몰라
나무 젓가락 포장지 접은 걸로
탁자 밑에 알지도 못하는 글씨를 쓰고 있노라면
국 한 그릇 더 떠오며
등짝에 손을 얹는 두툼한 고인의 손길
상주를 반짝 업어 왁자한 술청으로 내빼고 싶은데
술 한 잔 받으라며 어깨를 누르는 고인의 텁텁한 숨결

영정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며
착하게 온전히 살다 가느냐며 묻고 싶은데
번번이 망설이다 방을 나서는 길
복잡한 신발이나 가지런히 해놓고 싶어도
아무리 세어 봐도 한 사람의 몫이 모자라고
나는 돌아갈 때 어둑한 문간에 붉은 등 대신
신발을 벗어두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생각한지 오래

- 『바람의 사생활』(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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