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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가을밤의 풀벌레 소리/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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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6회 작성일 2025-04-18 08:28: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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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의 풀벌레 소리/안도현

풀벌레가 다른 풀벌레 소리 위에 자신의 소리를 한 겹 얹기 위해 우는 게 아니었다 한 소리에 다른 소리를 꿰매어 잇대려고 우는 것도 아니었다 풀벌레는 화전민의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풀벌레는 입에 물고 있던 풀숲을 펼쳐 풀잎을 만들고, 각자 손수 지은 풀잎의 처마와 내 귀 사이에 소리를 슬어놓느라 분주했다 울음이 불씨이므로 머지않아 풀숲은 화염에 휩싸이게 될 터 그래서 나는 풀벌레는 무너지기 위해 운다, 라고 쓴다

구름 한 점 없는 밤마다 풀숲에 자지러지던 별들은 떠났다 이제 별들과 풀벌레는 교접하지 않는다 별들이 풀밭에 설치했던 보면대(譜面臺)를 별자리라고 우기며 운명을 맡기는 자들이 아직도 세상에는 많다 땅에서 풀벌레가 울고 하늘에서 별이 운다고 믿던 단결과 연대의 시절은 분명히 갔다 나도 자주 아프면서 나이를 먹었다

그리하여 손톱에 박힌 가시와 수많은 잔소리들, 이별 직후의 쓰라림이 왜 풀벌레 소리를 내는지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을 뿐, 가을밤의 풀벌레가 불도 켜지 않고 왜 모두 다른 빛깔로 우는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네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악보를 떠올리는 아이들이 부디 없었으면 좋겠다 얘들아, 풀벌레 소리를 까마중 따먹듯이 따먹어다오 너희가 폐허에 숨은 음표잖니? 풀벌레 소리만 듣고도 그 풀벌레가 경작하는 풀잎을 그려 나에게 보여다오

- 『북항』(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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