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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그가 두고 온 빈집에선/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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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4회 작성일 2025-04-14 16:16: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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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두고 온 빈집에선/이정록

1​
사람이 떠나도 해마다
봉숭아는 씨앗주머니를 부풀린다
빗물에 싱거워진 장독에
잡초 무성한 정적(靜寂) 위에
장난처럼 꼬투리를 터뜨린다
고추잠자리가 잠깐 날개를 고쳐 앉을 뿐
무너진 굴뚝도, 선 끊긴 안테나도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망초꽃 우거진 안마당까지
퉁퉁 부은 관절로 봉숭아가 서 있다
사람이 떠났어도 해마다
마루턱에 탑을 쌓는 제비똥을 보며
낼름 꽃술을 내미는 봉숭아
버즘이 핀 잎사귀에
잠시 물기가 돈다


2​
키다리꽃처럼 담장을 넘보다가
빈 깍지만 싣고 떠나온 부끄러운 이사
씨앗은 멀리 터뜨려야 한다며 마음 달랬던
그는 이제 호박 속보다도 밝은 조끼를 입고
물꼬를 보듯 새벽일 나가는
환경미화원, 가연성 쓰레기통에서
불에 그을린 알미늄캔을 꺼내다가
텃밭에 묻은 돼지새끼를 떠올리는,
차령산맥 끄트머리에서 튕기친
귀 떨어진 문패, 그가 새벽안개를 헤치고
쓰레기통에 상반신을 넣었을 때
종을 울리듯 당목(撞木)처럼 달려든
…… 트럭 …… 혼미한 의식 너머로
일제히 터지는 봉숭아 꼬투리,
그때 두고 온 마을 빈집에선
탱자나무를 타고 오른 하눌타리가
진물을 흘리고 있었으며
봉숭아는 빈 깍지만 말아 쥔 채
입추(立秋)를 맞고 있었다

-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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