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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뚝지/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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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48회 작성일 2025-04-06 15:13:0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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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지/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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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앞바다 깊은 바위틈에 바보 물고기 뚝지가 산다 눈도 입도 멍청하게 생긴 수컷이 저만큼 멍청한 암컷의 배를 만지고 쓰다듬고 자꾸 눌러서 희부연 알 덩어리가 뭉게뭉게 쏟아지면, 그 위에 수컷은 밀린 오줌 싸듯이 정액을 쏟아붓는다 엉겁결에 수정이 끝나면 막무가내로 수컷은 암컷을 밀어내고 제 혼자 배를 까뒤집고 끈끈이주걱 같은 지느러미로 흐느적흐느적 산소를 불어 넣어준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온몸이 쭈그러들어, 쭈그러진 살갗 빼곡히 꼼지락거리는 기생충이 피를 빨아도 떼어낼 생각도 않고, 삽십 일이나 사십 일 斷腸의 세월이 끝나고 올챙이 꼬리 같은 새끼들이 어리광 부리며 헤엄쳐 나오면 그제야 수컷은 깊은숨 한번 들이킬 여가도 없이 숨을 거둔다 물론 그전이라도 배 출출한 무적의 무법자 대왕문어가 수시로 찾아와 육아에 바쁜 수컷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다

  2

때로 수컷 뚝지가 쫓아내도, 쫓아내도 떠나지 않는 암컷 뚝지를 기어코 밀어내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안 떠나려고 버둥거렸는지는, 혼자서 풀이 죽어 떠나가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대왕문어의 밥이 된 다음에야 알 수 있다 갈가리 찢긴 암컷의 아랫도리엔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알들이 무더기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보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할 거지,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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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 때는 수컷 뚝지가 눈 껌벅거리며 쉬임 없이 지느러미 놀려 가지런한 알들에게 산소를 불어넣어 줄 때, 제 짝을 못 구한 암컷 뚝지가 두리번거리며 찾아와 연애 한 번 하자고, 한 번만 하자고 졸라대지만, 수컷은 관심이 없다 아예 쳐다도 보지 않는 수컷은 막무가내로 암컷을 밀어내지만, 그것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치근덕거렸던가는 그 또한 대왕문어의 밥이 되어 뱃가죽 터지고 사지가 너덜거려야 알 수 있다 아무도, 아무도 애무해주지 않아 쏟아보지도 못한 알들이 무더기무더기 깊은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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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지만 잡아먹다가도 영 입맛이 없고 괜시리 성질 더러워지는 날에는 대왕문어 두 마리가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덤비다가 두 마리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죽음이 죽음을 잡아먹으려다 죽어버린 것이다

- 이성복,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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