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은] 오늘은 필리핀/임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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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필리핀/임지은
몇몇 사람이 모였다
대화의 주제는 여행 가고 싶은 도시
주로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안움직, 씨는 안 가본 도시의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것 같았고
자칭 여행가인 비정규직, 씨는
자주 이직해야 하는 탓에
출근마저 여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한 번도 말라본 적 없는 먹음직, 씨는
77사이즈가 보통 체형인 도시로
여행 가는 것을 선호했고
종일 환자들의 썩은 이를
들여다보는 전문직, 씨는
이제 그만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른 도시는 필리핀
에서 다 함께 먹는 머핀
위험하다면 잡아당겨 안전핀
뮤직, 씨가 온갖 핀으로 플로우를 타는 동안
발등의 불을 끄느라 뒤늦게
도착한 정직, 씨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스위치를 찾으려 했지만
그런 건 있을 리 만무했고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던
지지직, 씨는 공항으로 마중 나오라는
문자 대신 텔레파시를 보냈기에
속옷까지 전부 젖었다
내일은 이어폰
을 꽂고 출근할 테지만
오늘은 필리핀에 관한 시를 썼고
엊그제는 죽은 단어를 핀셋으로 건져 올렸다고
말한 이가 있었으니
아직 시인이란 꿈을 보관 중인 간직, 씨였다
몇몇 사람이 모였다
대화의 주제는 여행 가고 싶은 도시
주로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안움직, 씨는 안 가본 도시의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갈 것 같았고
자칭 여행가인 비정규직, 씨는
자주 이직해야 하는 탓에
출근마저 여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한 번도 말라본 적 없는 먹음직, 씨는
77사이즈가 보통 체형인 도시로
여행 가는 것을 선호했고
종일 환자들의 썩은 이를
들여다보는 전문직, 씨는
이제 그만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른 도시는 필리핀
에서 다 함께 먹는 머핀
위험하다면 잡아당겨 안전핀
뮤직, 씨가 온갖 핀으로 플로우를 타는 동안
발등의 불을 끄느라 뒤늦게
도착한 정직, 씨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스위치를 찾으려 했지만
그런 건 있을 리 만무했고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던
지지직, 씨는 공항으로 마중 나오라는
문자 대신 텔레파시를 보냈기에
속옷까지 전부 젖었다
내일은 이어폰
을 꽂고 출근할 테지만
오늘은 필리핀에 관한 시를 썼고
엊그제는 죽은 단어를 핀셋으로 건져 올렸다고
말한 이가 있었으니
아직 시인이란 꿈을 보관 중인 간직, 씨였다
댓글목록
이창민님의 댓글

이 시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시다. 시인의 위트에 웃음을 한가득 짓다가도 나 자신을 '○직, 씨'로 명명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꽤 오랜 시간 골몰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나직, 씨가 어울릴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직한 것을 좋아한다. 나직하게 내려앉은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 나직한 언덕에 올라가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직한 양옥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려오는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유달리 나직하게 떠다니는 여름날의 먹구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하늘로 치솟기만 하는 이 시대의 것들은 나직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오히려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나직한 것들을 자꾸만 그리워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일상을 거스르는 행위에 몸을 던져 언제까지고 헤엄칠 수 있는 것이 시인의 역량이라면, 시에 등장하는 간직, 씨는 이미 훌륭한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단어를 건져 올려 곱게 묻어 주는 것,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든 ‘시 쓰기’를 통해 그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 간직, 씨가 이미 살아내고 있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시대의 한 귀퉁이에서 나직한 것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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