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바다에서 바다를 못 읽다/유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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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바다를 못 읽다/유안진
바다에 와서 바다를 읽어봤다, 바다의, 망망함을 물빛을 물비늘을 깊이를 수평선을 파도를 해일을……, 물의 변신 물의 언어를, 물에 쓰이는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없는 태초의 말씀을, 방대한 바이블을
태초의 언어로 된 태초의 경전
창조신의 말씀책을
알아 못 듣는 목소리로 갈매기가 읽고 가도
알아 못 듣는 목청으로 바람이 읽고 가도
나의 문맹(文盲)은
어느 구절에다 붉은 줄을 그어야 할지
어느 페이지를 접어두고
어느 대목을 괄호쳐둘지 몰라
바다에 와서 바다는 못 읽어도, 내가 알아낸 건, 바다야말로 하늘이라고, 하늘이기 때문에 읽어내지 못한다고, 밤이 되자 바다는 달과 별무리 찬란한 하늘이었으니, 아무리 올라가도 하늘밑일 뿐이던 그 높이가, 눈 아래 두 발 아래 내려와 펼쳤다니, 가장 낮은 데가 가장 높은 곳이라는, 어렴풋한 짐작 하나 겨우 얻은 것 같다.
- 『다보탑을 줍다』(창비, 2004)
바다에 와서 바다를 읽어봤다, 바다의, 망망함을 물빛을 물비늘을 깊이를 수평선을 파도를 해일을……, 물의 변신 물의 언어를, 물에 쓰이는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없는 태초의 말씀을, 방대한 바이블을
태초의 언어로 된 태초의 경전
창조신의 말씀책을
알아 못 듣는 목소리로 갈매기가 읽고 가도
알아 못 듣는 목청으로 바람이 읽고 가도
나의 문맹(文盲)은
어느 구절에다 붉은 줄을 그어야 할지
어느 페이지를 접어두고
어느 대목을 괄호쳐둘지 몰라
바다에 와서 바다는 못 읽어도, 내가 알아낸 건, 바다야말로 하늘이라고, 하늘이기 때문에 읽어내지 못한다고, 밤이 되자 바다는 달과 별무리 찬란한 하늘이었으니, 아무리 올라가도 하늘밑일 뿐이던 그 높이가, 눈 아래 두 발 아래 내려와 펼쳤다니, 가장 낮은 데가 가장 높은 곳이라는, 어렴풋한 짐작 하나 겨우 얻은 것 같다.
- 『다보탑을 줍다』(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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