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 늪, 목포에서/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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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목포에서/박철
여자는 아팠다 여자는 십여분이 넘지 않는 간격으로 계속 몸을 뒤척였다 일이 끝나자마자 벗은 그대로 수이 잠이 든 그니였다 그러나 이내 깊은 잠이 들었는가 싶더니 채 삼십여분을 넘기지 않고 양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몸을 움직여댔다 맑은 이마에선 어느새 유리가루 같은 작은 땀방울이 솟아났다 목줄기 아래로 젖은 기운이 피부를 덮고 있었다 사내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을 때 여자는 다시 눈을 떴다 이마를 짚어보니 따가운 열기가 그대로 손끝에 전해왔다 여자는 아팠다 사내는 옷을 입은 몸으로 상체를 구부려 여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누가 보면 우스운 꼴이었다 여자는 눈을 마주하며 그대로 있었다 사내는 여자가 덮은 이불 위로 그의 상체를 포개어 구부리고 앉았다 여자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두 눈만 멀뚱히 뜬 채 천장을 향할 뿐이었다 그러다 여자의 손이 사내의 머릿결에 와닿았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골목 뒤에 해장국집이 있어요 꼭 식사하고 올라가요 이름이 뭐냐 지양이예요 그게 네 암호구나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병이 너를 떠날 거야 …… 여자는 아팠다 사내는 탁자 위에 놓인 기차표를 집어들었다 여자가 슬픈 눈으로 기차표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바람은 멎어 있었지만 제법 굵은 빗줄기가 어둠을 놓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기차표의 접힌 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한동안 망설였다 사내는 자신이 깊은 늪에 잠시 갇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늪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늪의 한가운데 한 여자가 더욱 깊이 빠져드는 그림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손을 뻗을 수는 없을까 그렇다 한들 어떻게 이 늪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비는 그치지 않을 기세였다 사내는 접혔던 창문의 커튼을 내리고 돌아섰다 여자는 그때까지 눈을 뜨고 있었다 사내가 돌아서 나서 후, 계단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그리고 문 밖을 나서 빗줄기 내리는 세상을 향해 질주할 때까지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누워 있었다
오빠아-
사내는 달려나갔고, 빗줄기를 뚫고,
그런 외마디가 사내를 쫓아오고 있었다
- 『험준한 사랑』(창비, 2005)
여자는 아팠다 여자는 십여분이 넘지 않는 간격으로 계속 몸을 뒤척였다 일이 끝나자마자 벗은 그대로 수이 잠이 든 그니였다 그러나 이내 깊은 잠이 들었는가 싶더니 채 삼십여분을 넘기지 않고 양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몸을 움직여댔다 맑은 이마에선 어느새 유리가루 같은 작은 땀방울이 솟아났다 목줄기 아래로 젖은 기운이 피부를 덮고 있었다 사내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을 때 여자는 다시 눈을 떴다 이마를 짚어보니 따가운 열기가 그대로 손끝에 전해왔다 여자는 아팠다 사내는 옷을 입은 몸으로 상체를 구부려 여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누가 보면 우스운 꼴이었다 여자는 눈을 마주하며 그대로 있었다 사내는 여자가 덮은 이불 위로 그의 상체를 포개어 구부리고 앉았다 여자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두 눈만 멀뚱히 뜬 채 천장을 향할 뿐이었다 그러다 여자의 손이 사내의 머릿결에 와닿았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골목 뒤에 해장국집이 있어요 꼭 식사하고 올라가요 이름이 뭐냐 지양이예요 그게 네 암호구나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병이 너를 떠날 거야 …… 여자는 아팠다 사내는 탁자 위에 놓인 기차표를 집어들었다 여자가 슬픈 눈으로 기차표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바람은 멎어 있었지만 제법 굵은 빗줄기가 어둠을 놓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기차표의 접힌 선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한동안 망설였다 사내는 자신이 깊은 늪에 잠시 갇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늪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늪의 한가운데 한 여자가 더욱 깊이 빠져드는 그림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손을 뻗을 수는 없을까 그렇다 한들 어떻게 이 늪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비는 그치지 않을 기세였다 사내는 접혔던 창문의 커튼을 내리고 돌아섰다 여자는 그때까지 눈을 뜨고 있었다 사내가 돌아서 나서 후, 계단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그리고 문 밖을 나서 빗줄기 내리는 세상을 향해 질주할 때까지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누워 있었다
오빠아-
사내는 달려나갔고, 빗줄기를 뚫고,
그런 외마디가 사내를 쫓아오고 있었다
- 『험준한 사랑』(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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