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섬/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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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도종환
당신이 물결이었을 때 나는 언덕이라 했다.
당신이 뭍으로 부는 따스한 바람이고자 했을 때
나는 까마득히 멈추어 선 벼랑이라 했다
어느 때 숨죽인 물살로 다가와
말없는 바위를 몰래몰래 건드려보기도 하다가
다만 용서하면서 되돌아 갔었노라 했다
언덕뿐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은 살았다 했다
당신의 가슴앓이가 파리하게 살갗에 배나올 때까지도
나는 깊어가는 당신의 병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어느 날 당신이 견딜 수 없는 파도를 토해 내 등을 때리고
한없이 쓰러지며 밀려가는 썰물이 되었을 때
놀란 얼굴로 내가 뒤돌아 보았을 때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리로 떠내려가 있었다
단 한 번의 큰 파도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당신을 따라가다 따라가다
그만 빈 갯벌이 되어 눕고 말았다
쓸쓸한 이 바다에도 다시 겨울이 오고 물살이 치고
돌아오지 못한 채 멈추어 선 나를
세월은 오래도록 가두어 놓고 있었다.
- 『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1986)
당신이 물결이었을 때 나는 언덕이라 했다.
당신이 뭍으로 부는 따스한 바람이고자 했을 때
나는 까마득히 멈추어 선 벼랑이라 했다
어느 때 숨죽인 물살로 다가와
말없는 바위를 몰래몰래 건드려보기도 하다가
다만 용서하면서 되돌아 갔었노라 했다
언덕뿐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은 살았다 했다
당신의 가슴앓이가 파리하게 살갗에 배나올 때까지도
나는 깊어가는 당신의 병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어느 날 당신이 견딜 수 없는 파도를 토해 내 등을 때리고
한없이 쓰러지며 밀려가는 썰물이 되었을 때
놀란 얼굴로 내가 뒤돌아 보았을 때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리로 떠내려가 있었다
단 한 번의 큰 파도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당신을 따라가다 따라가다
그만 빈 갯벌이 되어 눕고 말았다
쓸쓸한 이 바다에도 다시 겨울이 오고 물살이 치고
돌아오지 못한 채 멈추어 선 나를
세월은 오래도록 가두어 놓고 있었다.
- 『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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