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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칸나의 시절/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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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2회 작성일 2025-04-14 10:29: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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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의 시절/나희덕

난롯가에 둘러앉아 우리는
빨간 엑스란 내복을 뒤집어 이를 잡았었지.
솔기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이들은 난로 위에 던져졌지.
타닥타닥 튀어 오르던 이들, 우리의 생은
그보다도 높이 튀어오르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지.
황사가 오면 난로의 불도 꺼지고
볕이 드는 담장 아래 앉아 눈을 비볐지.
슬픔 대신 모래알이 눈 속에서 서걱거렸지.
봄이 와도 칸나가 필 때까지는 겨울이었지.
빨간 내복을 벗어던지면 그 자리에 칸나가 피어났지.
고아원 뜰에 칸나는 붉고
우리 마음은 붉음도 없이 푸석거렸지.
이 몇 마리 말고 우리가 키울 수 있는 게 있었을까.
칸나보다도 작았던 우리들, 질긴
나일론 양말들은 쉽게 작아지지 않았지.
황사의 나날들을 지나 열일곱 혹은 열여덟.
세상의 구석진 솔기 사이로 숨기 위해 흩어졌지.
솔기는 깊어 우리 만날 수도 없었지.
마주친다 해도 길을 잃었을 때뿐이었지.
이 한 마리마저 키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일론 양말들,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런 저녁을 밝혀줄 희미한 불빛에게
나는 묻지, 네 가슴에도 칸나는 피어 있는가, 라고.

- ​『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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