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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유령 난초/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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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1회 작성일 2025-05-10 21:44:0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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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난초/김선우

 향기도 빛깔도 거두고 땅 밑을 흐르는 바람을 홀로 매만져주고 있을 당신 가끔 햇빛이 톰방거리며 물 건너오는 소리 그리워지는 걸 보면 땅 밑에서 잎 틔우는 당신의 아름다운 독, 내 속으로 흘러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젯밤 내 꿈 밖을 서성이다 돌아간 당신, 당신 삶은 땅밑으로 오고 내 삶은 땅 위로 오기에 뛰어나가 당신을 맞지 못했습니다 죽은 네 오빠가 흙을 헤치고 다시 나올 것만 같구나, 당신의 안부를 영영 잃을까 경계에서 피고 저무는 어머니는 올해 더욱 여위었습니다 땅밑 깊은 꽃대궁 속으로 어머니가 긴 숨을 몰아쉴 때 세계가 슬픔으로 멈칫하였습니다 내 꿈 밖을 서성이다 홀로 돌아간 당신 몇년 만에 한번씩 당신은 땅밑에서 꽃을 피운다지요. 어머니 젖무덤에서 부화하던 바람은 언제쯤 당신의 어두운 방 앞에서 문 두드렸을까 애써 모르는 척 당신은 방문을 닫아걸고 아직 피지 않은 꽃잎 속 실핏줄을 후후 불어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 태양을 등진 식물인 당신 햇빛과 물을 향해 나아가지 않도록 당신이 꿈 밖에서 어머니 맨발에 입맞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햇빛을 가리며 물밥을 던지고 나는 문 안쪽으로 숨죽였습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독을 지녔으니 내 영혼의 음지로 흘러든 독을 모아 등잔을 띄웁니다 긴 독백을 이기고 환한 등 하나 당신의 기약없는 꽃대궁에 가 맺힐 수 있을까요 당신이 두고 간 발자국 하나하나 따뜻한 흙으로 덮어가는 어머니의 새벽 염불소리 멈추지 않습니다

-  『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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