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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효환] 삼척항에서 고래를 보았다/곽효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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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13회 작성일 2025-05-08 08:11:5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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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항에서 고래를 보았다/곽효환

유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 부둣가 마을에 살았다
노을이 지고 굴뚝에 밥 짓는 연기가 오르면
아직 놀이를 마치지 못한 아이들은
어둑어둑한 골목에서 남은 이야기를 나누며 아쉬움을 달랬다
항구의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는 고래라고 했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만 하다고 아니 더 크다고 했다
자반고등어와 조린 갈치가 먹어본 생선의 전부였던
내륙의 소도시에서 온 아이는
이내 주눅이 들어 고개를 주억거렸고
집보다 훨씬 더 큰 고래는 좀처럼 어림되지 않았다.

솜털이 덜 가신 열아홉,
정리되지 않은 더벅머리에 뻐드렁니 사이로 담배를 꼽아
좌중을 사로잡던 눈가에 웃음 많은 대학신문 선배는
강원도 남쪽 바닷가에서 온 고래라고 했다
수몰지 단양을 가로질러 중선암 계곡에서의 수습기자 수련회
그는 눈석임물이 흐르는 계곡물에
한 시간을 넘게 몸을 담갔다
내내 술을 마셨고 항상 여자가 있었고 또 바뀌었다
ㅡ 적어도 내가 보는 동안은 그랬고 늘 경이로웠다
신문을 만들 때면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바다였고
크기를 알 수 없는 고래와 같았다.
첨예한 떨림들, 기표를 넘나드는 활자들, 거친 숨결들
그런 그가 어느 날 돌연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 다시 바닷가에 섰다
숙소 창문 너머 펼쳐진 비에 젖은 드센 겨울 바다
긴 여행길에 밀려드는 피로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말들이
외롭게 천장을 맴돌다 흩어진다
텔레비전 위성방송에서는 8피트가 넘는
거구의 레슬러 빅쇼의 ‘빅쇼’가 지리하게 흘러가고
멀리 칠흑의 바다 위에 뜬 집어등 몇 개
젖은 창가에 표정 없이 떠 있는
홀로 뒤척이는 겨울밤
문득 집채만 한 아니 그보다 큰 고래가 번쩍하고 지나간다
예전처럼 다시 무뎌진 내게로
어둠을 넘어 여명처럼 그가 온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가 돌아온다
검은 바다를 건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섬광 같은 것이 불끈
삼척항의 밤을 붉게 물들이며 지나간다

- ​『인디오 여인』(민음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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