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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멸치처럼​/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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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7회 작성일 2025-04-16 13:12:3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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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처럼​/김명인

멸치 가게 여자가 박스를 열어
몇 묶음째 상품을 보여준다
몸과 몸을 흔들어 한 무리임을 확인시키지만
군집을 모르는 손님에겐 못 가본 바다 같다
멸치는 팔려서라도 돌아갈 물 길이 없다
있다 해도 짓뭉개진 뒤에야 놓여날
그물망, 어제까지 안 그랬다고 여자가 말했다
은빛 파도에 떠밀려 파닥거리는 멸치를
채반째 데쳐 비늘이 생생하도록 바람에 널었으니
그물을 싣고 항구를 들락거리는 건 배의 사정,
장마 탓이지만 마침 그때 일이 떠올랐을 뿐
머리를 떼면 흑연 같은 속셈이 딸려 나와
멸치는 곤곤해진다, 그러니 안주로 부른들 뭐 하랴
촘촘하게 엮인 투망을 덮어쓰는 절기에도
물기 다 거둔 멸치는 건건하다
비쩍 마른 여자가 삐꺽거리는 좌판에서 돌아선다
한 번도 제 영역을 지켜낸 적 없는, 멸치
저걸 덮치려고 고래까지 아가리를 활짝 벌린다

-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문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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