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것에 대한 성찰/김선태 > ㄱ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354
어제
861
최대
3,544
전체
298,101
  • H
  • HOME

 

[김선태] 둥근 것에 대한 성찰/김선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이창민 조회 42회 작성일 2025-04-06 21:34:27 댓글 0

본문

둥근 것에 대한 성찰/김선태
- 정도리 몽돌밭論

 겨울 정도리 바닷가에 가보았다. 불혹토록, 지치고 찢긴 희망처럼 날리는 눈보라를 따라갔다. 무수하다는 돌멩이들이 둥그렇게 몸을 맞대고 있는 정도리 몽돌밭. 모난 돌멩이 하나로 끼어 이 적요(寂寥)의 겨울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직 하나도 거둬들이지 못한 삶의 물음표 같은 부표들 바다에 하얗게 띄우고 소나무숲에 찢어지게 열린 바람소리 본다. 눈 감고 누워 있으면 몽돌들의 울음소리 바닷게들처럼 귓속을 들락거리고 있다.

 파도가 말을 가르치는 정도리 바닷가. 제대로 발음이 될 때까지 사정없이 돌멩이들의 귀썀을 후리는 소리로 종일토록 정도리 바닷가는 때글때글 깨어 있다. 때로는 가슴을 치는 때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리로 돌멩이들은 끊임없이 제 모난 살점을 덜어내며 둥글고 단단해진다. 찌그러진 불협화음을 받아 얼른 둥글게 오무라뜨리는 저 소리의 반복 교차. 오랜 시간의 퇴적을 쌓고 또 부수는 저 울음 속에 정도리 바닷가의 내밀한 세계가 있다. 서러움 따위를 다 눌러 죽인 끝에야 찾아오는 정갈한 소리의 비밀이 있다.

 정도리 바닷가 몽돌들은 저마다 색깔과 무늬가 서로 다르다. 그러나 모두가 둥글다. 서로에게 둥글어서 아무렇게나 뒹굴어도 아프지 않는 것들이 함께 모여 한세상을 이룬다. 시퍼렇게 침입한 바다를 팔 벌려 감싸는 해변의 끝에서 끝까지를 맨발로 걸어본다. 몽돌들의 이마를 짚으며 걸어가노라면 단단하게 여문 말씀들이 차례로 발바닥에 와 닿는다. 그것들은 모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한다. 모든 둥근 것들은 모난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가만 들여다보면 다채로운 세월의 물결무늬 선명한 그것들은 가끔씩 들여다보는 자의 얼굴을 되돌려 주기도 한다.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알아 구계(九階)의 질서로 빛나는 몽돌들, 가장 몸이 가벼운 것들이 바다 깊숙이 유영하리라.

 다시 정도리 바닷가에 굵은 사유의 눈발이 치고 있다. 이제 파도는 무지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며 몇 번이고 타이른다. 오래 절망을 견딘 자만이 둥글고 단단한 희망 하나를 품을 수 있다고, 뼈 시린 바닷물에 깊게 몸 담근 자만이 비로소 아름다운 진실 하나를 건져낼 수 있다고, 돌아가라 돌아가라 되뇐다. 저물 무렵, 정도리 바닷가에 동그란 해가 걸린다. 각진 마음의 기슭을 물들이며 환하고도 따스한 상처가 걸린다. 내일 새벽이면 저 몽돌들이 더욱 차고 정갈한 목소리로 다도해 전체의 섬들을 불러 깨우리라.

- 김선태,『동백숲에 길을 묻다』(세계사, 200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