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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 진분홍색/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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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46회 작성일 2025-04-06 20:33:4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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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분홍색/김해자

 그날 아침 사랑방이 열리지 않았어 전날 밤 언니는 꽃 피는 수를 가지고 놀았지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는 노래도 가르쳐줬어 어떻게 문이 열렸을까 아이는 언니가 시렁 위에서 그네를 타는 걸 보았지 으히히 장난치는 줄 알았잖아 목에서 빨간 보자기를 풀었을 때 언닌 따듯했어 아인 볼을 만지고 코를 누르고 입술도 살짝 잡아당겼지 언니 입에서 강강술래 소리가 새 나왔던 던 같아 소리 매기며 강강술래 춤을 가르치던 언니야, 강강술래 해봐, 빨리 고학년 돼서 강강술래 하고 싶어 둥둥둥둥 언니 소리 따라 강강술래 강강술래 강강술래 …

 스물세 살 언닌 곱게 화장하고 투피스 입고 누워 있었지 노라노양장점에서 맞췄다는 티 한 점 없는 진분홍색이 모두 관 속에 갇히도록 아인 마당가에서 채송화 모가질 비틀었어 연분홍 노랑 빨강 아무리 봐도 언니 같은 색이 없잖아 언닌 그날 오후 산 너머로 이사 갔어 어른들 따라 뾰족구두 신고 걸어가는 언니 뒤를 종종 따라갔지 오른팔 왼팔 앞으로 뒤로 하나씩만 보여주는 팔꿈치가 빛났어

 숨바꼭질 했던 거야 아주 오랫동안 아인 술래 아무도 찾을 수 없었어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 다시 채송화 모가지를 비트는데 길쭉한 그림자가 들어섰지 벙어리였나 봐 손짓을 막 했어 시든 채송화 한 줌 들고 아인 남잘 데리고 언니 새집을 찾아갔어 짐승이었나봐 목에서 으흐흐 짐승 소리가 났어 귀신이었는지도 몰라 뗏장풀 뜯으며 으시시 귀신같이 울더라니까 남자 손톱에 핏빛 노을이 스며들었지 아, 바로 저 색이야, 마침 그때 새 한 마리 휘리리이, 허공 내젓는 진분홍 손톱 위로 휘리리 돌다 사라져 가더라구

- 김해자, 『집에 가자』(도서출판 삶창,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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