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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 벽 너머 남자/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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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48회 작성일 2025-04-06 20:33:0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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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너머 남자/김해자

가끔 공동 수돗가에서 만나면 사알짝 웃기도 했는데, 마당 끝에 있는 변소 앞에 줄 서 있기라도 하면
출근길 그 남자 미안한 듯 고개 숙이고 지나갔는데, 어느 차가운 밤 골목 입구에서, 고구마 냄새나는 따뜻한 비닐봉다리 안겨주고 도망가기도 했는데, 충청도 어디 바닷가에서 왔다던가 사출공장 다닌다던가

기침 소리, 라면 냄새 다 건너오던 닭장 집, 얇은 벽 너머 함께 살았지. 벽 하나 사이 두고 나란히 누웠던 그 남자 느닷없이 죽어, 하얀 보자기 씌워져 실려 가고서야 알았지. 세상에 벽 하나 그리 두터운 줄 벽 하나가 그리 먼 줄

말이나 해보지, 벽이나 두드려 보지, 죄 없는 벽만 쥐어박다 손때 묻은 벽 앞에 제상 하나 차렸다네. 고봉밥에 무국 고사리 도라지나물 해서 떡 사과 배도 얹고, 밥상 걸게 바쳤다네 이왕 가는 길 힘내서 가라고, 그 겨울 내내 벽 앞에 물 한 그릇 올렸다네

추석이 낼 모레, 십이야 고운 달빛 아래
마른 고사리 데쳐놓고 도라지 흰 살 쪼개며
삼십 년 되어가는 옛 이야기 풀어놓는 여자

웃어나 줄 걸 따듯하게 손이나 잡아줄 걸
그까짓 여자남자가 뭐라고 죽고 나면
썩어문드러질 몸땡이 그까짓 게 다 뭐라고

그 때 그 더벅머리 어미뻘 되어가는 여자
나잇살 차곡차곡 채워가며
산골짝 처녀귀신으로 늙어가네

- 김해자,『해자네 점집』(걷는사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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