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식] 이탈 이후/김중식
페이지 정보
본문
이탈 이후/김중식
1
중심이 있었을 땐 적(敵)이 분명했었으나 이제는 활처럼 긴장해도 겨냥할 표적이 없다
그러나 타협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한다 빗방울을 퉁퉁 튕겨 보낸다 박살 낸다 그러다가
이게 아닌데, 이미 몸 적신 주제에 이게 아닌데 중얼거리다가 매 맞기로 결심한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우박도 내리자
두들겨 매 맞아야 몸이 편할 것 같다며 머리카락 쥐어뜯으며 어찌해야 기억을 지울 수 있느냐 나는 왜 뻔뻔스러워지지 못하느냐 울부짖으며
2
우산도 뒤집어지면
비에 젖네
젖은 우산에 내리는 비는
쌓이네
비여
사무친 이를 적시지 마라
비참의 방둑이 무너지네
객혈을 하네
흐르는 건 흐를 뿐
흐르면
상처의 바닥이 아플 뿐
참을 수 있으나
흐르다가 뒤돌아보면
젖은 남자의 피가 쌓이네
쌓이네
잊고 싶어서 못 잊은, 시뻘건, 순결.
_《황금빛 모서리》(김중식, 문학과 지성, 1993)
1
중심이 있었을 땐 적(敵)이 분명했었으나 이제는 활처럼 긴장해도 겨냥할 표적이 없다
그러나 타협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한다 빗방울을 퉁퉁 튕겨 보낸다 박살 낸다 그러다가
이게 아닌데, 이미 몸 적신 주제에 이게 아닌데 중얼거리다가 매 맞기로 결심한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우박도 내리자
두들겨 매 맞아야 몸이 편할 것 같다며 머리카락 쥐어뜯으며 어찌해야 기억을 지울 수 있느냐 나는 왜 뻔뻔스러워지지 못하느냐 울부짖으며
2
우산도 뒤집어지면
비에 젖네
젖은 우산에 내리는 비는
쌓이네
비여
사무친 이를 적시지 마라
비참의 방둑이 무너지네
객혈을 하네
흐르는 건 흐를 뿐
흐르면
상처의 바닥이 아플 뿐
참을 수 있으나
흐르다가 뒤돌아보면
젖은 남자의 피가 쌓이네
쌓이네
잊고 싶어서 못 잊은, 시뻘건, 순결.
_《황금빛 모서리》(김중식, 문학과 지성, 199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