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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우울한 악보/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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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42회 작성일 2025-05-26 18:37:2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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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악보/이문재

그래 너도 이런 날 저물 무렵이면
은행나무쯤으로 한껏 낙엽이나 만들어, 버릴 것
모두 버리고, 그늘이 있던 자리까지도 비워내면서
땅에 두 발을 담그고 온전한 줄기로만 남아
잠시 서 있을 수 있다면
빛이 있는 나절에는 그림자에게도 얼마쯤의 눈길을 주며
바람 불어 추운 날에는 어둔 뿌리의 얘기도 밤늦도록 들어주면서
그래 너도 은행나무 오래된 것쯤으로
이런 세월의 진한 황달을 한 번의 일로 앓아봤으면
좋을 일, 얼마나 좋을 일인가, 죽일 것들의
이름들, 너의 전부에 달라붙은, 달라붙는 죽일 것들의 이름을
여름날 잎사귀의 푸름에 새겨 넣으면서, 어둔 잎사귀의
그늘도 내려놓으면서, 천천히 지나와
이런 날, 하루이틀쯤의 품으로 모두 버릴 수 있다면
그래 겨우내 추운 꿈을 꾸면서 다가오는 봄 앞에
맨몸으로 나설 수 있다면, 맨몸의 부끄러움만으로 봄을
마주볼 수 있다면, 그래
언제나 뜨겁기만 해 싫은 사람의 말 대신에 나도
너의 근처 멀지 않은 어디쯤 은행나무의 수컷으로 서서,
넉넉한 바람의 안깃에다 단 한 번의 언어를 집어넣을 수 있다면,

 -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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