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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안동/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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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1회 작성일 2025-04-18 08:33:0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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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안도현

매화는 방 안에서 피고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어머니는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시를 읽고 있었다
누이야,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한편 쓰면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았다
가출한 아버지는 삼십 년 넘게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어머니는 딸을 낳지 못했다

아내는 무채를 썰고 있었다
도마 위로 눈 내리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생채와 들기름으로 볶은 뭇국을 좋아했다

매화는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했다
동생들은 관절염에는 수술이 최고라고 말했고
저릿저릿한 형광등이 매화의 환부를 내려다보았고
환부가 우리를 키웠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누이야,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쓰면
우리 애들과 조카들이 좋아할 것 같았다
고모가 생겼으니 고모부도 생기고
고종사촌도 생기니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궁을 꺼내 내다 버렸고
시는 한줄도 내게 오지 않았다

저녁이 절룩거리며 오고 있었다
술상에는 소고기 육회와 문어숙회가 차려졌고
우리는 소주를 어두운 배 속으로 삼켰다
폐허가 온전한 거처였다
누구도 폐허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안동시 평화동 낡은 아파트 베란다 바깥으로
쉬지 않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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