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깊은 가을/도종환
페이지 정보
본문
깊은 가을/도종환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비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오르는 햇살의 비늘을 만져 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 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아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2006)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비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오르는 햇살의 비늘을 만져 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 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아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 『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 20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