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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마른 연못/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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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41회 작성일 2025-05-20 19:25:4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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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연못/나희덕

물이 빠져나간 거대한 연못,
언젠가 눈에 박힌 그 풍경 나가지 않네

장화 신은 발들이
연못 바닥을 저벅저벅 걸어다니네
울컥 고이는 발자국을
검고 끈적한 진흙이 삼켜버리네

호미를 든 손들이
땅속 깊이 박힌 연뿌리를 캐네
숭숭 뿌리 뽑힌 자리마다
진흙이 뱀처럼 흘러들어 스르르 문을 닫네

장갑을 낀 손들이
바닥에 흩어진 잔해를 그러모으네
이토록 태울 게 많았던가
번제를 올리듯 어떤 손이 불을 붙이네

타오르면서 타오르지 않는 불의 중심,
명치끝이 점점 뜨거워지네
눈이 너무 매워 움직일 수가 없네

뇌수에서 썩어가던 기억의 잎과 줄기가
몇줌의 재가 되어가는 동안
장화 신은 발들이 불을 둘러싸고 서 있네

그들이 주고받는 얘기 들렸다 안 들렸다 하고
누구일까, 내 몸을 제물 삼아
마른 연못에서 불을 피우는 그들은

- 『야생 사과』(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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