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은] 한낮의 몽유/강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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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몽유/강성은
정수리의 태양이 일순간 검게 변해 흘러내리는데
잠든 아이들의 눈꺼풀을 나뭇잎처럼 똑똑 따는데
나쁜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잠옷 차림의 나는 운동화 끈을 씹으며 다리 위를 걸어간다
이곳은 마녀의 젖꼭지처럼 추워
잠옷 속으로 얼음 손가락들이 들어왔다 이내 녹아지고
다리 위로 계절들은 달려가고 애인들은 흩어지고
나는 열두살 때 입었던 잠옷을 입은 채로 다리 위를 걸어간다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동전들
늙은 개가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작은 눈 안에서 나는 개와 입맞춘다
청소부의 커다란 빗자루가 내 맨발을 부지런히 쓸어내린다
강물 위로 물고기의 붉은 눈알이 떠오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자장가를 부르며 나는 다리 위를 걸어간다
바닥에 흘러내린 검은 태양이 자꾸만 내 뒤를 따라온다
다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다시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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