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2022년 한국경제 신춘문예]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박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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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 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
박규현
-1996년 서울 출생
-서울 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재학
♣ 심사평
랭보의 시’ 떠올리게 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
2022 년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와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응모작이 많았다 . 코로나 19 상황 속에서 동시대인들의 절박한 생활 , 희망을 찾고자 하는 고투 등이 반영돼 있었다 .
본심에서는 네 분의 작품을 놓고 토론과 숙고를 거쳤다 . 박서령의 ‘재수강 ’은 서사를 이어가며 감정을 표출하는 데 능숙했다 . 그러나 편지 형식의 산문성으로부터 도약하는 힘이 부족했다 . 박언주의 ‘도둑 잡기 ’에서는 생존과 죽음 , 세계를 향한 질문들이 돋보였다 . 그러나 시적 이미지나 음악성을 가려버리는 설명적 진술들은 아쉬움을 키웠다 . 임원묵의 ‘새와 램프 ’는 끊어질 듯 이어가며 이동하고 합류하는 언어 실험이 새로웠다 . 그러나 언어는 평이해 가능성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
만장일치로 박규현의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 읽는 줄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흡입력에 놀랐다 . 이어질 수 없는 문장과 문장들의 연접을 통한 긴장감 , 착란적 비약 , 예상을 건너뛰는 불연속성에도 다 읽고 나면 이미지가 선연히 발생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 그는 사소한 일상의 가치를 애써 찾아가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라고 기록하는 시 . 간신히 발설하는 이 미세한 약음이야말로 거대 담론이나 외치는 소리보다 시적 울림이 크다는 것을 , 시는 ‘침묵하기 ’와 ‘겨우 말하기 ’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드린다 .
심사위원 (황지우, 손택수, 김이듬)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 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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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현
-1996년 서울 출생
-서울 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재학
♣ 심사평
랭보의 시’ 떠올리게 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
2022 년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와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응모작이 많았다 . 코로나 19 상황 속에서 동시대인들의 절박한 생활 , 희망을 찾고자 하는 고투 등이 반영돼 있었다 .
본심에서는 네 분의 작품을 놓고 토론과 숙고를 거쳤다 . 박서령의 ‘재수강 ’은 서사를 이어가며 감정을 표출하는 데 능숙했다 . 그러나 편지 형식의 산문성으로부터 도약하는 힘이 부족했다 . 박언주의 ‘도둑 잡기 ’에서는 생존과 죽음 , 세계를 향한 질문들이 돋보였다 . 그러나 시적 이미지나 음악성을 가려버리는 설명적 진술들은 아쉬움을 키웠다 . 임원묵의 ‘새와 램프 ’는 끊어질 듯 이어가며 이동하고 합류하는 언어 실험이 새로웠다 . 그러나 언어는 평이해 가능성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
만장일치로 박규현의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 읽는 줄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흡입력에 놀랐다 . 이어질 수 없는 문장과 문장들의 연접을 통한 긴장감 , 착란적 비약 , 예상을 건너뛰는 불연속성에도 다 읽고 나면 이미지가 선연히 발생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 그는 사소한 일상의 가치를 애써 찾아가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라고 기록하는 시 . 간신히 발설하는 이 미세한 약음이야말로 거대 담론이나 외치는 소리보다 시적 울림이 크다는 것을 , 시는 ‘침묵하기 ’와 ‘겨우 말하기 ’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드린다 .
심사위원 (황지우, 손택수, 김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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