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202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산사/최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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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최원준
범종 소리에
겨울 은사시나무가 흔들리고
송백에 남아 있던 가느다란 푸른 선이 흔들리고
밤을 지켜보던 소쩍새 눈동자 흔들리고
범종 소리는
옹송그리며 가지에 점으로 앉은
꽃봉오리를 툭 하고 건드리고
툭 하고 밀치다가 서로 얼싸안기도 하고
그리하여
범종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매화나무는 가지에
꽃을 점점이 피워낸다.
고요가 있고, 적막이 있고
그 속에 소란이 있고
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
범종 소리에
계곡은 파문을 일으키고,
바람 따라 그 소리 배회하다가
팔상도 쓰다듬으며
부처님 안전에 매화향 전해주면
범종 소리에
밤은 끝을 비추고
동쪽 산은 붉은 점안식 준비를 재촉하였다.
-----------------
당선소감 / 최원준
죽비 한 아름 받은 기분
직장 생활을 하며 두 번 큰 고비를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마치 십 년 주기처럼 10년 차에 한 번, 20년 차에 또 한 번이었는데 그때마다 주저앉은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시 창작이었습니다. 첫 번째 고비 때는 덜컥 대학원에 진학해 김명인 선생님과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고, 두 번째 고비 때는 정근과 함께 글자 하나하나 새기며 잠시 놓았던 시를 썼습니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부족한 저를 당겨주신 심사위원님께 많은 죽비를 받은 것 같습니다. 세상이 참으로 시끄럽지만 잡스러운 말이 없는 부처님 세계, 그 세계에서 조그마한 울림이라도 듣기 위해 정진하라는 말씀으로 죽비 한 아름을 받겠습니다. 또한 초보 불자로서, 생활인으로서, 시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불교 문학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시를 놓고 방황하던 저에게 화두를 던져준 김덕근 시인, 박순원 시인, 이재표 시인 등 충북고 벽문학회 회원들, 그리고 넓고 깊은 생각을 나눠준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소모임 동료들과 정효구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화를 잘 내고 예민했던 저를 둥글게 다듬어 주시는 청주 혜은사 관세음보살님과 부모산 연화사 미륵존불께 이번 주에 꼭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엇나가는 저를 시시로 바로잡아 주는 무일 우학스님의 금강경 강의도 늦지 않게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지금까지 키워 주신 자애로운 어머니 조 여사님께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이었기에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제는 제가 조금씩 스스로 걸어가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시재가 없고 서툴지만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자비심을 갖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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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문태준 시인
구도심으로 바라본 세계
올해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많은 분들의 응모가 있었다. 구도(求道)의 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불교시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편들이 주를 이뤘다. 욕망의 제어, 내면의 평정(平靜)과 빛, 사찰 풍경 등을 다루었고, 특히 열암곡 마애부처님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숨은꽃’, ‘만휘 진리’, ‘바람의 여정’, ‘반가사유상’, ‘만화경’, ‘산사’, ‘윤필암에서’, ‘신륵사’ 등의 작품에 주목했고, 당선작 선정을 두고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바람의 여정’, ‘반가사유상’, ‘산사’였다.
‘바람의 여정’은 숙련된 시조 창작의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벌판에서 산기슭, 봉우리와 능선을 지나 다시 하강해 강물에 스며드는 바람의 행로를 시종 따라가면서 결박됨이 없는 바람의 자유자재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허허로운”, “요란하게”, “헉헉거리며” 등의 시어 선택에서 보여주듯이 공간과 주체를 수식하는 시어를 조금만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반가사유상’은 견고한 고요와 고고함을 읽어내는 시안(詩眼)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절대적 지복의 얼굴”이라고 쓴 시구나 “모든 경계를 허무는 순간/ 주고받는 것이 유리처럼 맑다”와 같은 시행은 독창적이었다. 언어를 절제하고, 언어를 거듭하여 덜어내는 퇴고 과정이 오래 있었더라면 보다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작은 ‘산사’로 결정했다. 이 시는 산중 사찰 공간에서의 범종 소리의 울려 퍼짐과 부처님을 향한 예경을 노래했는데, 무엇보다 대상과 대상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작용을 간파하는 시적 인식이 빼어났다. 하나의 움직임 속에 있는 밀침과 끌어안음, 적요와 어수선함을 동시에 읽어내는 안목도 높았다. 특히 “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이라고 쓴 대목은 수일(秀逸)했다. 여기에는 일순과 시간의 경과,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 정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이 미려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러한 능력이라면 앞으로 마음밭을 일궈 불교시, 그리고 한국시의 일신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범종 소리에
겨울 은사시나무가 흔들리고
송백에 남아 있던 가느다란 푸른 선이 흔들리고
밤을 지켜보던 소쩍새 눈동자 흔들리고
범종 소리는
옹송그리며 가지에 점으로 앉은
꽃봉오리를 툭 하고 건드리고
툭 하고 밀치다가 서로 얼싸안기도 하고
그리하여
범종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매화나무는 가지에
꽃을 점점이 피워낸다.
고요가 있고, 적막이 있고
그 속에 소란이 있고
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
범종 소리에
계곡은 파문을 일으키고,
바람 따라 그 소리 배회하다가
팔상도 쓰다듬으며
부처님 안전에 매화향 전해주면
범종 소리에
밤은 끝을 비추고
동쪽 산은 붉은 점안식 준비를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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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 최원준
죽비 한 아름 받은 기분
직장 생활을 하며 두 번 큰 고비를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마치 십 년 주기처럼 10년 차에 한 번, 20년 차에 또 한 번이었는데 그때마다 주저앉은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시 창작이었습니다. 첫 번째 고비 때는 덜컥 대학원에 진학해 김명인 선생님과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고, 두 번째 고비 때는 정근과 함께 글자 하나하나 새기며 잠시 놓았던 시를 썼습니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부족한 저를 당겨주신 심사위원님께 많은 죽비를 받은 것 같습니다. 세상이 참으로 시끄럽지만 잡스러운 말이 없는 부처님 세계, 그 세계에서 조그마한 울림이라도 듣기 위해 정진하라는 말씀으로 죽비 한 아름을 받겠습니다. 또한 초보 불자로서, 생활인으로서, 시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불교 문학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시를 놓고 방황하던 저에게 화두를 던져준 김덕근 시인, 박순원 시인, 이재표 시인 등 충북고 벽문학회 회원들, 그리고 넓고 깊은 생각을 나눠준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소모임 동료들과 정효구 교수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화를 잘 내고 예민했던 저를 둥글게 다듬어 주시는 청주 혜은사 관세음보살님과 부모산 연화사 미륵존불께 이번 주에 꼭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엇나가는 저를 시시로 바로잡아 주는 무일 우학스님의 금강경 강의도 늦지 않게 챙기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지금까지 키워 주신 자애로운 어머니 조 여사님께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이었기에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제는 제가 조금씩 스스로 걸어가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시재가 없고 서툴지만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자비심을 갖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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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 문태준 시인
구도심으로 바라본 세계
올해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많은 분들의 응모가 있었다. 구도(求道)의 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불교시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편들이 주를 이뤘다. 욕망의 제어, 내면의 평정(平靜)과 빛, 사찰 풍경 등을 다루었고, 특히 열암곡 마애부처님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숨은꽃’, ‘만휘 진리’, ‘바람의 여정’, ‘반가사유상’, ‘만화경’, ‘산사’, ‘윤필암에서’, ‘신륵사’ 등의 작품에 주목했고, 당선작 선정을 두고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바람의 여정’, ‘반가사유상’, ‘산사’였다.
‘바람의 여정’은 숙련된 시조 창작의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벌판에서 산기슭, 봉우리와 능선을 지나 다시 하강해 강물에 스며드는 바람의 행로를 시종 따라가면서 결박됨이 없는 바람의 자유자재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허허로운”, “요란하게”, “헉헉거리며” 등의 시어 선택에서 보여주듯이 공간과 주체를 수식하는 시어를 조금만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반가사유상’은 견고한 고요와 고고함을 읽어내는 시안(詩眼)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절대적 지복의 얼굴”이라고 쓴 시구나 “모든 경계를 허무는 순간/ 주고받는 것이 유리처럼 맑다”와 같은 시행은 독창적이었다. 언어를 절제하고, 언어를 거듭하여 덜어내는 퇴고 과정이 오래 있었더라면 보다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작은 ‘산사’로 결정했다. 이 시는 산중 사찰 공간에서의 범종 소리의 울려 퍼짐과 부처님을 향한 예경을 노래했는데, 무엇보다 대상과 대상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작용을 간파하는 시적 인식이 빼어났다. 하나의 움직임 속에 있는 밀침과 끌어안음, 적요와 어수선함을 동시에 읽어내는 안목도 높았다. 특히 “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이라고 쓴 대목은 수일(秀逸)했다. 여기에는 일순과 시간의 경과,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 정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이 미려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러한 능력이라면 앞으로 마음밭을 일궈 불교시, 그리고 한국시의 일신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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