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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눈사람/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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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0회 작성일 2025-04-06 17:14:0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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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정호승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
을지로입구역 롯데백화점으로 올라가는 지하계단 옆
몇명의 사내가 라면박스로 정성껏 집을 짓는다
땅속에 파는 관 자리처럼
한 사람이 누우면 꽉 들어찰 크기로 모서리를 맞추고
하루에 한번씩 하관하는 연습을 한다
지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
새들처럼 지붕을 짓지 않는
넓은 종이의 집에 하관하듯 들어가 사내들이 잠이 들면
슬며시 사내들의 그림자가 일어난다
먹다 남긴 김밥 몇 토막과
쓰러진 술병에 조금 남은 소주 몇모금을 마시고 집을 나선다
거리엔 축복인 양 눈이 내린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진다
비 오는 날 소의 등에 비닐을 씌우고 논갈이를 하던 아버지와
아궁이에 고구마를 구워주던 어머니와
첫아이를 낳다 죽은 아내 이야기를 하며
노숙의 그림자들은 밤새도록 눈길을 걷다가
그만 지하도 종이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사람이 되어 서서 잠이 든다

- 정호승,『여행』(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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