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나무의 말 /이재무 > 아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116
어제
960
최대
3,544
전체
349,791
  • H
  • HOME

 

[이재무] 말 없는 나무의 말 /이재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이창민 조회 45회 작성일 2025-05-30 08:47:28 댓글 0

본문

말 없는 나무의 말 /이재무

이사 온 아파트 베란다 앞 수령 50년 오동나무
​저 굵은 줄기와 가지 속에는 얼마나 많은,
구성진 가락과 음표들 살고 있을까
과묵한 얼굴을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마주 대하고 있으면 들끓는 소음의 부유물 조용히 가라앉는다
기골이 장대한 데다 과묵한 그에게서 그러나 나는 참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나도 모르는 전생과 후생에 대하여 말하기도 하는데
구업 짓지 말라는 것과 떠나온 것들에 연연해하지 말 것과
인과에는 반드시 응보가 따른다는 것을
옹알옹알 저만 알아듣는 소리로 조근거리며
솥뚜껑처럼 굵은 이파리들 아래로 무겁게 떨어뜨린다
동갑내기인 그가 나는 왜 까닭 없이 어렵고 두려운가
어느 날인가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던 밤은
누군가 창문 흔드는 소리에 깨어 일어나보니
베란다 밖 그가 어울리지 않게 우람한 덩치를 크게 흔들어대며 울고 있었다
나는 그 옛날 무슨 말 못할 설운 까닭으로
달빛 스산한 밤 토방에 앉아 식구들 몰래 속으로 삼켜 울던 아버지의 울음을
훔쳐본 것처럼 당황스러워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했는데
다음 날 아침 그는, 예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시치미 딱 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 데면데면 나를 대하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생활에 지고 돌아온 저녁 그가 또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참 이상하다 벌써 골백번도 더 들은 말인데
그가 하는 말은 처음인 듯 새록새록,
김장 텃밭에 배추 쌓이듯 차곡차곡 귀에 들어와 앉는 것인지
불편한 속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그의 몸속에 살고 있는 가락과 음표들 절로 흘러나와서
뭉쳐 딱딱해진 몸과 마음 구석구석 주물러주고 두들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 『경쾌한 유랑』(문학과지성사, 201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