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이정록 > 아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1,378
어제
861
최대
3,544
전체
299,125
  • H
  • HOME

 

[이정록] 황태/이정록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이창민 조회 25회 작성일 2025-04-14 15:59:18 댓글 0

본문

황태/이정록
 - 전성태에게

  대관령에서 사온 거라며 황태를 한 꾸러미 내놓았다.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얼음을 깨고 들어간 일개 소대원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강원도의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중국산이라 쓰여 있었다. 1·4후퇴 때 ​포로로 잡힌 ​놈들일까. 마음 같아서는 컴컴한 얼음 계곡에다 ​처박고 ​싶었다. ​개마고원이나 백두산 어디쯤에서 눈보라를 ​견딘 북한산이라면 ​몰라도, 값싼 중국산을, 그것도 국토의 ​허리뼈에다 황태 덕장인 양 가설무대를 차려놓고 눈속임을 ​하다니, 판 놈이나 사온 ​후배나 덩달아 따라온 녀석들이나 ​괘씸하고 ​한심하고 측은했다. 하지만, 영하의 날씨에 ​턱주가리를 ​부닥뜨리며 이빨을 풀었을 한 사나이와, 그걸 ​알고도 ​부릉거리며 따라다니는 푸른 트럭과, 동상에 걸려 ​있을 ​몸빼의 발가락을 생각해보면, 사타구니에 삼팔선이라도 ​들이친 것처럼 거시기했다. 거시기하고도 거시기한 ​겨울밤, ​방구석에 밀쳐놓은 비닐봉지에서 잠결엔 듯 눈보라 치는 ​소리 들려왔다. 그 파도 소리에 가만 ​귀 기울여​보니 ​대관령 것보다는 내가 먼저 첫눈을 맞았다고, 이래 봬도 ​바다를 떠난 지 석삼 년은 족히 되었다고, 죽어서 국경을 넘기가 그리 쉬운줄 아느냐고 ​구시렁거렸다. ​이 시인 나부랭이야, 전쟁을 겪은 나라에서 ​주검에 대한 ​예우가 이것밖에 안 되냐고, 예까지 와서 이런 외롭고 ​가난한 대면식을 해야되겠냐고 씨부렁거렸다. ​​자작나무 ​장작개비 한 두름, 언제 눈을 다 닫아버렸을까. ​성에 가득한 녀석들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그래도 이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서 나발거리냐고,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냄비에 처넣었다. 한 움큼 고춧가루도 뿌려​주었다. 물이 끓자 고춧가루를 들이마신 핏발 선 눈알들이 날 노려보았다. 눈 내리는 새벽, 무슨 대륙적인 상봉식인가. 중국산 고량주가 연신 축축한 몸을 기울였다. 

 - 『의자』(문학과지성사, 20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