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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빈 그네/이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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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5회 작성일 2025-04-12 19:36:4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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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그네/이재무

암운의 조국과 민족 때문에, 부끄럽지만 한 끼도 걸러본 적 없는 내가
한 여자가 주는 실연으로 꼬박 사흘을 내리 굶은 적이 있다
그녀가 생사 관장하던 그해 겨울 눈이 자주 내려 벌판을 백지로 만들곤 해서
나는 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을 수놓곤 했는데 아시다시피
눈은 나흘 이상을 살아내기 어렵다
그해 시해당한 대통령 때문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통행금지도 두 시간이 앞당겨졌다
나는 예정보다 빨리 군의 부름을 받았다
망설이던 끝에 그녀를 불러내 밥과 술을 사주고
화원에 들러 화분 하나를 사서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
음악다방에 들러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청해 듣고 나와 으슥한 골목 돌아
어린이 놀이터에 갔다 놀이터엔 빈 그네가 있었는데
작고 여리게 몸 흔들며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자꾸 칭얼대며 달라붙는 눈발을 털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충직한 하인이었다 그녀가 걸터앉은 그네를 열심히 밀어주었다
그녀의 밥사발같이 둥근 등이 내 가슴에 부딪쳐오는 동안
나는 질 나쁜 연탄처럼 자주 꺼지곤 하던 우리의 사랑을 떠올렸다
탁구공같이 경쾌한 그녀의 웃음이 차고 단단해진 밤공기를 가르고 가서
개천바닥 진흙에 몸을 문질러댔다 내 몸속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자꾸 나쁜 생각이 나서 얼굴에 땀이 솟았다
눈은 어느새 그쳐 있었고 바람은 제법 사나워졌다
나는 구두에 달라붙는 흙을 털어내면서 집으로 왔다
유배지에 갇혀 지내는 동안 그녀에게서 온 몇 번의 편지는 나를 감동시켰다
면회 온다던 날에 소포로 날아온 동화책 ‘조나단’이 관물대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높이 나는 새가 되어 나를 떠났다
그날 이후 마음의 배가 고파오면 나는 그네를 떠올린다
누군가를 열심히 밀어주는 동안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는 동안 쉽게 몸이 달아오르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뜨거워지면 사랑은 벌써 떠날 채비를 하기 때문이다

-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도서출판 화남,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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