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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북녘 거처/안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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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7회 작성일 2025-04-12 13:33:1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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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거처/안상학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시를 처음 끼적여본 공책이 놓여 있던
내가 살아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천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준 라면 한 끼 훌쩍이던 식탁
누이동생이 그토록 다니고 싶어 한 학교를 물러난 소년
상계동 종점 창이 없는 그 집 열일곱 한 달
그 어느 하루로라도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지하철 4호선 종점 당고개역 솟은 그 너머
아배 편지 한 장 받아들고 눈물 찍으며 돌아섰던
이제는 의지가지없는 그 곳
불알 친구는 십년 뒤 낙향하여 낙동강에 목숨을 흘려보냈고
편지 한 장으로 나를 불러 내렸던 아배도 오래 전 소식 없고
누이동생도 다른 하늘을 이고 산 지 오래
열일곱 소년만 꼬박꼬박 혼자서만 나이 먹어가며
이 낡은 남녘에서
다 늦어 또다시 가출을 감행할 꿈을 꾸며
그 북녘을 떠올려 봅니다만, 벌써부터 야외전축도 없고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 레코드판도 없어진 지 오랩니다만,
갈 수만 있다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동안 써왔던 시를 하나하나 지워가며
내 삶의 가장 먼 그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
당신은 인생길 어디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없습니까
있다면 남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남녘입니까
미안한 일인지 어떤지 나는 아직 그 북녘입니다만,
당신, 당신들은 지금 어느 녘에 있습니까

-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걷는사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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