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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마음의 고향 1/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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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40회 작성일 2025-04-08 08:24:4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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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1/이시영
 ㅡ 白夜

키가 훌러덩 크고 웃을 때면 양 볼에 깊이 보조개가 패이는
작은집 형수가 나는 좋았다
시집온 지 며칠도 안 돼 웃냇가 밭에 나왔다가
하교길 수박서리하다 붙들린 우리 패거리 중에서 나를 찾아내
"데름, 그러문 안 되는 것이라우" 할 때에도
수줍은 듯 불 밝힌 두 볼에 피어나던 보조개꽃 무늬
아, 웃냇가 웃냇가
방아다리 지나 쑥대풀 우거지고 미루나무숲 바람에 춤추는 곳
사래 긴 밭에 수많은 형수들이 엎드려
하루종일 밭고랑 너머로 남쪽 나라 십자성 부르는 곳
저녁에 소몰이꾼 우리들이 멱감는 냇가로 호미 씻으러 내려와서는
"데름, 너무 짚은 곳에는 들어가지 마씨요 이" 할 적에도
왈칵 풍기는 형수의 땀냄새가 나는 좋았다
홀시아버지 밑 형제 많은 집으로 시집와 남정네마저 전쟁터에 보내놓고
새벽논에 물대기 식전밭에 고추따기 아침볕에 보리널기 쏘내기밭에서 소고삐 몰아쥐고 송아지 찾기로 여름 내내 등적삼에 벼이슬 걷힐 날 없으면서도
저녁이면 선선한 모깃불을 피워 놓고 콩국수 말아
와상 가득 흥겨운 집안 잔치를 벌일 줄도 알았던 형수,
모깃불 매캐하게 사위어가고 하나 둘 어린 형제들 잠들어갈 무렵이면
내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데름, 데름은 꼭 우리 집안의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쓰우."
"훌륭한 사람이 워떤 사람인디라우?"
"장군 같은 것, 그 뭣이라더라 밥풀 여럿 단 쏘위 같은 것……"
그러면 마당 한구석에서 다가온 어둠이 빤한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쏟아질 것만 같은 내 눈에
갑자기 별빛 한 무더기가 쏟아져내렸다
환한 밤이었다

- 이시영,『무늬』(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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