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겨울밤/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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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이시영
도봉산 지나 의정부 산골 마을에서 송(宋)과 함께 자취를 한 적이 있다. 건너편 방엔 삼양라면 다니는 처녀 다섯이 묵고 있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처녀들이 타월로 머리를 묶고 우물가에서 어푸어푸 세수할 때가 좋았는데 그들의 흰 목덜미가 아침 햇살에 눈 시리게 빛났다. 일요일이면 삼양동 사는 양금섭이가 클래식 기타를 들고 찾아와 우리 모두에게 알 수 없는 서양 노래들을 들려주곤 하였는데 노래보다는 평상 위에 곤로의 심지를 잔뜩 올리고 부쳐먹던 감자전 맛이 더 좋았다.
이가 고른 한 처녀는 경상도 산청에서, 또 누구는 인월에서 왔다고 하는데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깊이 패이는 처녀는 가슴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고요해지면 의정부 가는 미 2사단 장갑차들이 아스팔트를 파며 굉음을 울리고 도봉산 유원지의 전봇대들이 깜짝깜짝 놀라며 키가 클 것 같은 밤, 이불 속에 각자의 고단한 다리를 넣고 치는 육백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 동창이 환히 밝아오기도 했다.
- 이시영,『은빛 호각』(창비, 2003)
도봉산 지나 의정부 산골 마을에서 송(宋)과 함께 자취를 한 적이 있다. 건너편 방엔 삼양라면 다니는 처녀 다섯이 묵고 있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처녀들이 타월로 머리를 묶고 우물가에서 어푸어푸 세수할 때가 좋았는데 그들의 흰 목덜미가 아침 햇살에 눈 시리게 빛났다. 일요일이면 삼양동 사는 양금섭이가 클래식 기타를 들고 찾아와 우리 모두에게 알 수 없는 서양 노래들을 들려주곤 하였는데 노래보다는 평상 위에 곤로의 심지를 잔뜩 올리고 부쳐먹던 감자전 맛이 더 좋았다.
이가 고른 한 처녀는 경상도 산청에서, 또 누구는 인월에서 왔다고 하는데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깊이 패이는 처녀는 가슴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고요해지면 의정부 가는 미 2사단 장갑차들이 아스팔트를 파며 굉음을 울리고 도봉산 유원지의 전봇대들이 깜짝깜짝 놀라며 키가 클 것 같은 밤, 이불 속에 각자의 고단한 다리를 넣고 치는 육백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 동창이 환히 밝아오기도 했다.
- 이시영,『은빛 호각』(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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