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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성환. 1980/이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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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64회 작성일 2025-02-09 18:16:0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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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成歡). 1980/이윤학

그해 겨울, 우리의 얼어붙은 가슴 위로 무너져내리던 함박눈도
시들한 사랑처럼 멎고, 소읍(小邑)에서 우리를 묶어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에 함박눈 내리듯 우리들의 침묵은
언덕으로 쌓여갔고 흐린 일기의 세상은 때늦은 비명 소리를
질러댔다 지나가는 기차는 보이지 않았다

사랑의 날이 온다면 언젠가 그런 날이 와준다면
탄불 위에 올라 먼지 앉고 불어터진 냄비 속의
라면발 같은 얼어붙은 굶주림 같은, 겨울이 다 가기까지
우리들은 피지 못한 복사꽃 무늬의 장판 위에
군용 담요를 펴고 화투를 돌렸다
가끔씩 눈발이 환한 세월을 금긋고 지나갔고
멀리에서 텅 빈 시내버스가 좁은 빙판길을
체인 소리를 감으며 지나다녔다 누구 하나 사고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삼륜차 한 대가 다리 위에서 떨어졌을 뿐 졸음은, 우리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지 못했다 우리는 귀에 익은 유행가를
불렀다 절망은 우리의 몫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사건은 없었다 올 것이 없으므로 더 와야 할 것이 없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걷지 않았다 멱살을 잡고
흔들 이유가 없었다

이곳에서 떠날 곳이 어디인가!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은
없었다 우리의 물음은 나무 위의 눈덩이를
털어낼 줄도 몰랐고 불순한 일기 속에서 피어난
개나리꽃을 보았지만 감격의 눈물은 더 이상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가을에 잎 떨구고 얼어죽은 나무였기에 부활은
우리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을 뿐, 얼어붙은 입으로 군침을 집어삼키게 했을 뿐……

우리는 어려서 술주정을 배웠고 빈정거리거나 냄새 나는 입을 벌려
욕을 지껄였다. 그해 겨울, 우리의 얼어붙은 가슴 위로 무너져내리던 함박눈도
시들한 사랑처럼 멎고, 小邑에서 우리를 묶어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시집 『먼지의 집』/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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