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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한계령에서/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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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0회 작성일 2025-06-27 20:00:5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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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에서/이기철

어디로 가려고 길들은 저렇게 숨가쁘게  산을 오르고 있나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
바람은 더 쓰러뜨릴 것이 없어 겨울 하늘을 소리내어 불고 있다
마음 놓이지 않아 녹을 수 없는 눈은
땅을 덮고 뼈로 서있는 바위를 덮었는데
우리 떠나고 나면 혼자 남을 초가 한 채는
밤이 오면 누구에게 제 가진 불빛 하나를 건네주어야 하나
동으로는 내설악과 진부령이 2월 초하루의 얼어붙은 냇물에
발을 꽂고 서 있고
서로는 인제와 원통이 누더기를 입고 막사 뒤에 누워 있다
서울 180킬로, 기슭의 이정표는 햇빛 아래 선연하지만
어느 곳에도 통천 · 원산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은 없다
날고 싶은 새들은 힘이 부쳐 고로쇠나무 검은 가지에 날개를 접고
가끔 상수리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와
툭툭 떨어지는 눈뭉치 말고는 살아 있는 것이라곤 이곳에 없다
저 얼어 붙은 소양강가엔 언제 제비꽃이 필 것인가
砲口들은 언제까지 북쪽을 향해 어둠을 입에 물고 서있을 것인가
빨리 흐르는 냇물처럼 마음은 급해져
우리는 왜 해 떨어지기 전에 북으로 오르던 발길을 돌려
남쪽으로만 가야 하는가.

- 『내 사랑은 해 지는 영토에』(문학과비평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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