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흠] 얼룩의 얼굴/이대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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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의 얼굴/이대흠
장구를 치다가 가죽에 번져 있는 얼룩을 본 적이 있다 커다란 몸뚱이를 감쌌던 소가죽이 몸을 다 잃고 매 맞아가면서도 놓지 않아 말라붙은 소 울음소리
그날의 소리는 죽지 않았고 떠나간 자들은 아주 떠나지 못한다
누군가를 오래 그리다보면 문득 그의 얼굴이 얼룩 속에서 살아난다 때로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얼굴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았을지라도 모르는 얼굴은 아니다 잊힌 한때에 내가 그리워했던 얼굴이거나 나를 잊지 못한 누군가가 난데없이 방문한 것
바람이 비의 몸으로 와서 남긴 발자국이라는 증언이 있었다 꽃의 숨결이 향기로 와서 쓰러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몇 개의 인과는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법, 그것들은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일 뿐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내가 꽃의 혀를 건네면 너도 꽃의 말을 걸어온다 잎이거나 가시이거나 내가 준 것을 너는 갚으러 온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돌아온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터뜨릴 수 없고 말랑한 벽, 거기서 얼룩이 태어난다
눌어붙은 주검이 있었던 검은 바닥에서 고양이 한마리 불쑥 튀어나와 담 너머로 사라진다
-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창비, 2018)
장구를 치다가 가죽에 번져 있는 얼룩을 본 적이 있다 커다란 몸뚱이를 감쌌던 소가죽이 몸을 다 잃고 매 맞아가면서도 놓지 않아 말라붙은 소 울음소리
그날의 소리는 죽지 않았고 떠나간 자들은 아주 떠나지 못한다
누군가를 오래 그리다보면 문득 그의 얼굴이 얼룩 속에서 살아난다 때로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얼굴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았을지라도 모르는 얼굴은 아니다 잊힌 한때에 내가 그리워했던 얼굴이거나 나를 잊지 못한 누군가가 난데없이 방문한 것
바람이 비의 몸으로 와서 남긴 발자국이라는 증언이 있었다 꽃의 숨결이 향기로 와서 쓰러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몇 개의 인과는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법, 그것들은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일 뿐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내가 꽃의 혀를 건네면 너도 꽃의 말을 걸어온다 잎이거나 가시이거나 내가 준 것을 너는 갚으러 온다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돌아온다 너와 나 사이에 있는 터뜨릴 수 없고 말랑한 벽, 거기서 얼룩이 태어난다
눌어붙은 주검이 있었던 검은 바닥에서 고양이 한마리 불쑥 튀어나와 담 너머로 사라진다
-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창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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