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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붉은 돼지들/송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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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5회 작성일 2025-05-30 08:07:1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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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돼지들/송찬호

​​돼지 운반차량이 전복되고
간신히 살아남은 붉은 돼지들이
가까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지친 네다리로 땅만 보고 걷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한결같았다
그들은 그들의 무리를 표시하는
어떤 나뭇가지도 입에 물지 않고 있었다

언덕에는 지난 여름 지독한 피부병을 앓은
버짐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었고
약수터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길은
오래전 이 길을 지나간
어떤 종교의 이동경로와 흡사했다
그러기에 그들의 다치고 지친 몸을 쉬기에
언덕은 지나치게 통속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붉은 돼지들이었다
환란이 오면 그들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후각으로 땅을 헤쳐
붉은 돼지씨를 심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난 다섯달동안 쉼없이 살을 찌웠고
만족할만한 무게로 계체량을 통과했다
돼지 운반차량은 그들을 싣고
새벽별 돋는 초승달 도축장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언덕을 오르며 돌부리를 디딜 때마다
두 갈래로 갈라진 그들의 발굽에서
오래 걸은 자들의 나막신 소리가 났다

환란이 올때마다
붉은 돼지들에게 전해지는 말,
흙으로 가라
언덕으로 가라

- 『분홍 나막신』(문학과지성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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