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세실리아] 풍장/손세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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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손세실리아
실젖 한 올 길게 뽑아 허공에 수십 칸 방을 들이고 반듯한 길 사방에 닦는 거미의 지극한 마음을 본다 한 그리움이 천공에 거꾸로 매달려 또 한 그리움을 향해 외줄 타고 건너는 엄정한 의식을 본다 밤 이슥토록 금간 외벽을 짚고 도시가스 금속관을 기어오르다 결국 실낱같은 허벅지 뭉툭 잘려나가고 완두콩만한 등 짓물러 터져버린 저토록 느릿한 슬픈 생애.
귀퉁이 반듯한 방 한 칸 훔쳐 가늘고 질긴 미완의 그물 집에 나 잠시 몸 눕히려 하니 절간처럼 고요한 거미의 홑눈아, 혹여 낯모를 뭉툭한 사지가 눈에 가시로 박히더라도 아파하지 말아라 빼내려들지 말아라 사람 안에서 길 잃고 전신의 촉수 마모된 내 뼈이거늘 닳은 그리움이거늘 날 위해 그대가 해줄 일은 날 것조차 비상하지 않는 밀도 높은 신도시 절벽으로 물기 밴 바람 간간이 물어 나르는 일 다만, 이 쓸쓸한 장례에 대해 함구하는 일.
- 『기차를 놓치다』(도서출판 애지, 2006)
실젖 한 올 길게 뽑아 허공에 수십 칸 방을 들이고 반듯한 길 사방에 닦는 거미의 지극한 마음을 본다 한 그리움이 천공에 거꾸로 매달려 또 한 그리움을 향해 외줄 타고 건너는 엄정한 의식을 본다 밤 이슥토록 금간 외벽을 짚고 도시가스 금속관을 기어오르다 결국 실낱같은 허벅지 뭉툭 잘려나가고 완두콩만한 등 짓물러 터져버린 저토록 느릿한 슬픈 생애.
귀퉁이 반듯한 방 한 칸 훔쳐 가늘고 질긴 미완의 그물 집에 나 잠시 몸 눕히려 하니 절간처럼 고요한 거미의 홑눈아, 혹여 낯모를 뭉툭한 사지가 눈에 가시로 박히더라도 아파하지 말아라 빼내려들지 말아라 사람 안에서 길 잃고 전신의 촉수 마모된 내 뼈이거늘 닳은 그리움이거늘 날 위해 그대가 해줄 일은 날 것조차 비상하지 않는 밀도 높은 신도시 절벽으로 물기 밴 바람 간간이 물어 나르는 일 다만, 이 쓸쓸한 장례에 대해 함구하는 일.
- 『기차를 놓치다』(도서출판 애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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