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용서/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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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신경림
성당 앞 골목에서 아이들이 개미떼를 짓밟고 있다.
어떤 놈은 몸이 두 동강이 나고 어떤 놈은 머리가 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다리가 몽땅 떨어져나간 몸통만을 가지고 땅바닥을 허우적거리는 놈도 있다.
아이들은 더 신명이 난다. 조각조각 찢다 못해 가루가 되도록 짓이기는 녀석도 있다.
개미굴은 아예 까뭉개져 자취도없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내가 개미가 되어 거대한 존재한테 짓이겨지는.
내가 사는 도시가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큰 건물들이 종이집처럼 맥없이 주저앉는.
나와 내 이웃들이 흔들리는 골목을 고래의 뱃속에서처럼 서로 부딪치고 박치기를 하며 우왕좌왕하는.
우리가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의 존재와도 우리의 생각과도 우리의 증오와도 우리의 사랑과도 그밖의 우리의 아무 것과도 상관이 없는 그 거대한 존재를 향해, 오오 주여, 용서하소서, 끊임없이 울부짖는.
천년을 만년을 그렇게 울부짖기만 하는.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무엇 때문에 용서하는 지도 모르면서.
- 신경림,『낙타』(창비, 2008)
성당 앞 골목에서 아이들이 개미떼를 짓밟고 있다.
어떤 놈은 몸이 두 동강이 나고 어떤 놈은 머리가 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다리가 몽땅 떨어져나간 몸통만을 가지고 땅바닥을 허우적거리는 놈도 있다.
아이들은 더 신명이 난다. 조각조각 찢다 못해 가루가 되도록 짓이기는 녀석도 있다.
개미굴은 아예 까뭉개져 자취도없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내가 개미가 되어 거대한 존재한테 짓이겨지는.
내가 사는 도시가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큰 건물들이 종이집처럼 맥없이 주저앉는.
나와 내 이웃들이 흔들리는 골목을 고래의 뱃속에서처럼 서로 부딪치고 박치기를 하며 우왕좌왕하는.
우리가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의 존재와도 우리의 생각과도 우리의 증오와도 우리의 사랑과도 그밖의 우리의 아무 것과도 상관이 없는 그 거대한 존재를 향해, 오오 주여, 용서하소서, 끊임없이 울부짖는.
천년을 만년을 그렇게 울부짖기만 하는.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무엇 때문에 용서하는 지도 모르면서.
- 신경림,『낙타』(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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