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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나의 마흔, 봄/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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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2회 작성일 2025-04-06 22:11:5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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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흔, 봄/신경림

웬 낯선 사람이 들어와 자느냐고 고함을 지르는 할머니와
아들도 몰라보는 데 화가 난 아버지가 대들어 싸우던,
나는 그 봄이 싫다.
마당가에는 앵두꽃이 지고 작약이 피기 시작했지만
봄이 다 가도록 흙바람이 자지 않던,
눈을 뜨고도 간밤의 과음으로 자리에서 못 일어나는 몸에서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떠나지 않던, 마흔이 싫다.
바쁜 것은 늘 어머니 혼자여서 뒷산에 가 물을 긷고,
등교하는 어린 손자들의 과제물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던,
진종일 뿌연 채 다시는 맑은 하늘이 보일 것 같지 않던,
지금도 꿈속에서 찾아가는, 그 봄이 싫다.
그리워서 찾아가는 나의 젊은 날이 싫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빈둥대다가 저녁이 되면
친구들을 만나 터무니없이 들뜨던 술집이 싫고,
통금에 쫓겨 헐레벌떡 돌아오면 늦도록 기다리다
문을 따주던 아버지의 앙상한 손이 싫다.
중풍으로 저는 다리가 싫고
죽은 아내의 체취가 밴 달빛이 싫다.
지금도 꿈속에서 찾아가는, 어쩌다 그리워서 찾아가는
어쩌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한다는,
헤어나도 언젠가 다시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나의 마흔이 싫다.

 - 신경림,『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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