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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권] 콩나물국 먹는 날/박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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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30회 작성일 2025-05-10 21:47:2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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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국 먹는 날/박형권

오늘은 주인집 할머니가 우리 사는 지하방으로
자네 있는가, 새삼 다감하게 물어오는 날
기르는 콩나물 한 바구니 들고 오는 날
고맙게 받아서 국 끓이고 무쳐먹지만
가끔은 콩나물이 싫다네
콩나물로 비유하면 지하방은 뿌리에 속해
집이 우리를 넉넉히 빨아먹어야 아지랑이 속에서
집은 바로 설 수 있다네
우리 식구 좋아하는 족발보쌈보다
딸아이의 보충수업비보다
유일하게 넣는 의료보험보다 조금은 더 비싼 방세를 올려주면
주인집 할머니 팬더곰처럼
속이 안 보이는 콩나물 한 바구니 들고 오신다네
일하면 먹고 아니면 굶으며 결국 지하방에 도착하였지만
사실 우리는 집을 먹이는 뿌리혹박테리아
우리가 있어서 집의 부름켜에 따뜻한 피가 돈다네
애면글면 키워놨더니 미국 이민 가버려
숟가락이나 뜨고 사는지 들어갈 구멍이나 있는지
딸 아들 생각하며
주인집 할머니는 오늘도 콩나물을 기르고,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가 살지
가지도 살지 잎도 살지
그리하여 잎 끝으로 찾아오는
이른 봄도 살지 하며
김치도 내려주고 고구마도 내려주고 경칩이 지난 개구리도 내려주지만
생때같은 방세 삼십오만원, 시원히 풀라고
콩나물 한 바구니 들고 내려와 슬그머니 쓰린 속에 밀어 넣고 간다네
지표면에 콩밭 한평 가꾸고 싶어지는
오늘은 콩나물국 먹는 날

- 『전당포는 항구다』(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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