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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굴비/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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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회 작성일 2025-04-30 15:37: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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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박성우

노인은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편지함에서 떨어진 우편물처럼
마당 바깥쪽에 낮게 엎드린 노인은
왼팔의 극히 일부만을
파란 대문 안쪽에 들여놓은 채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노인의 오른팔에 쥐어진 검정봉지엔
비틀비틀 따라왔을 술병이 숨막힌 머리를 겨우 쳐들었다

처마 밑에는 누군가 보내준 굴비 한두름이
대문 틈 사이로 밀려지던 손가락을 지켜본 듯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각지에서 내려온 핏줄들이 술렁이는 동안
노인은 마당 밖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야 했다
집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노인 옆에 있던 무전기가 반복해서 말했다.

부검된 노인이 방 안으로 옮겨지기 전부터
흑백사진 앞에 나란히 뉘어지던 굴비는
뜬눈으로 조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잔치 내내 생볏짚을 먹어야 했던 암소가
트럭에 실려나간 뒤 대문이 닫혀졌고 노인처럼
헛간으로 아무렇게나 버려지던 태우다 만 목발 하나,
밤마다 절름절름 빈 마당을 돌았다

조기는 굴비가 되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
석쇠에서조차 눈을 치켜뜨고
세상 조여오던 그물을 온몸으로 기억해낸다

-  『거미』(창작과비평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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