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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느리게 걷는 밤산보 길/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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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8회 작성일 2025-04-20 15:39:0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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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는 밤산보 길/박형준

​나는 천변에서 밤산보를 하고 있었다
낮에는 흩어졌던 오리들이
물가에 서로 모여 깃털을 붙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앞에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가는 중년 사내가
손으로 바퀴를 움직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사내는 잠깐잠깐 휠체어를 멈추고선
천변의 꽃 쪽으로 허리를 숙이곤 하였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꽃들에게 얼굴을 내밀고선
꽃들이 잘 자는지 숨 냄새를 살피고 있었다
사내는 자전거도로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나아갈 것 같았다
나도 옆으로 바라보며 느리게 걷는
밤산보 길이었다
사내의 뒤에 한걸음 떨어져서
밤오리처럼 가까워져서 옆에서 나는 밤길 냄새를 맡고 있었다

-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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