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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택] 저수지/박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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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19회 작성일 2025-04-16 08:11:2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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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박주택

당신은 꽃이 핀 마을에 도착했다 저수지에는 벚꽃이 둘러 피어 있었는데 바람이 불자 하얀 꽃잎들이 햇빛을 받으며 흩날리곤 했다

당신은 천천히 홀로 걸음으로써 저수지에 비친 산그늘을 주저 없이 움직이게 하고 이제 막 어떤 기억에서 흘러나온 물들은 떨어지는 꽃잎의 낙인을 받아들인다

멀리서 당신은 세상에서 떠난 사람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지 코트에 솟은 아름다운 가시 때문만이 아니다

지나간 자리마다에서 생기는 정적이 꼼짝도 하지 않고 주위에 번지고 있었고 당신은 어둠으로부터 나온 사람처럼 고개를 들고 하늘을 되받아넘기고 있었다 —그때마다 산그늘이 비틀거리며 내려앉았다

당신은 육체이기 전에 먹먹한 귀를 가진 푸른 공기로부터 나오는 구름의 물방울로 태어난 사람처럼 짓눌려 있다 모두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빛이 반질거리는 것을 이빨 아래 드러내고 있는 사이 당신은 태어나는 기억의 눈동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저수지 수문 앞에 이르러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힐끗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이 강력한 빛을 뿜어댔다, 불타오르는 것 같이 울부짖는 것 같이 서로에게 운이 다한 공모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이

조용히 저수지의 물살이 주름을 지우듯 울려 퍼지는 그 산벚꽃나무 그림자 땅에 자신을 새기는 동안 당신은 떨어지는 꽃잎 속으로 흰 구름 아래 저수지 속으로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하얗게 사라져가네

-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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