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라연] 지리산 고로쇠나무/박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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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고로쇠나무/박라연
1
오얏골에 봄이 오면
사람들의 죄 씻어주기 위하여
일제히 눈뜨고 팔 벌리는
늙은 고로쇠나무
아무런 생각 없이 예수가 되어
물관부의 오른쪽과 왼쪽에
칼을 꽂고 피 흘린다
우리 아픈 점액질은 밤마다
산을 물어뜯고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어서
한철 내내 속이 쓰린 나무들
전생애의 옷을 벗는다
벗어버린 고로쇠나무 몇몇 씨앗들이
빛을 향해 뻗쳐오르고
오르던 푸른 팔들이
하늘 끝에 감전됐다 싸늘히
슬픈 눈빛으로 빛나던 수액들은 지금
흐르고 싶다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반야봉 낮은 기슭으로
2
시퍼렇게 잘려진 산맥 허리마다
깊어가는 죄만큼 슬픔만큼
발목에 붕대를 감고 서서 기다리는
지리산 고로쇠나무 달궁마을에서
산안개 내려와 투박한
그대 어깨를 주무를 때
눈물 흐른다 흐르는 눈물 밟으며
밤새워 걸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떠나온 산 안 잊히는 얼굴들을
-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문학과지성사, 1990)
1
오얏골에 봄이 오면
사람들의 죄 씻어주기 위하여
일제히 눈뜨고 팔 벌리는
늙은 고로쇠나무
아무런 생각 없이 예수가 되어
물관부의 오른쪽과 왼쪽에
칼을 꽂고 피 흘린다
우리 아픈 점액질은 밤마다
산을 물어뜯고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어서
한철 내내 속이 쓰린 나무들
전생애의 옷을 벗는다
벗어버린 고로쇠나무 몇몇 씨앗들이
빛을 향해 뻗쳐오르고
오르던 푸른 팔들이
하늘 끝에 감전됐다 싸늘히
슬픈 눈빛으로 빛나던 수액들은 지금
흐르고 싶다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반야봉 낮은 기슭으로
2
시퍼렇게 잘려진 산맥 허리마다
깊어가는 죄만큼 슬픔만큼
발목에 붕대를 감고 서서 기다리는
지리산 고로쇠나무 달궁마을에서
산안개 내려와 투박한
그대 어깨를 주무를 때
눈물 흐른다 흐르는 눈물 밟으며
밤새워 걸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떠나온 산 안 잊히는 얼굴들을
-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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