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 홍원항/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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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항/박성우
홍원항은 늙은 작부다 소주 한 병 더 달라는 사내의 말을 무시한 채 욕설 가득 퍼담은 뜨거운 국밥을 넌지시 밀어놓고 담배에 불을 댕겨 무는 늙은 작부다 한때 밤마다 몇송이고 피워올리던 해당화, 잔뿌리조차 말라버린 지 오래인 음부를 가진 늙은 작부다 새벽 갯바람에 미닫이문이라도 덜컹거리면 딱히 기다리는 사람도 올 사람도 없는데 습관처럼 문을 열어보는 늙은 작부다 속 쓰린 사내들에게 꿀물을 타준 적은 뭇별처럼 많아도 정작 자신의 뒤틀리는 속을 위해서는 꿀물을 한번도 타본 적이 없는 늙은 작부다 홍원항은 늙은 작부다 극약 같은 사랑이나, 폐선처럼 쓸쓸한 세월이나,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배신이나, 막막한 쓸쓸함과 그리움이나, 어떤 말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들을 주저리주저리 꺼내며 나는 늙은 작부와 단둘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삼켜서는 안될 초승달을 삼켜 배앓이를 해야 했던 얘기와 대책없이 쏟아지는 압정별에 눈을 찔려 충혈되어야만 했던 얘기를 시작으로 늙은 작부와 대작하고 싶다 술을 마시다 말고 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거리면 늙은 작부는 내게 지나온 내력을 풀어내며 왜 나이를 먹을수록 쌉쌀한 음식을 좋아하게 되는지 연거푸 소주잔을 비우며 말해주겠지 자꾸 엉켜가는 혀로 엉킨 그물 같은 삶을 풀어내겠지 그러다가 늙은 작부는 한숨을 쉬듯 세월이 약이라는 식상한 말로 나를 위로하며 내 등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치겠지 하지만 그렇듯 식상하고 극히 상투적인 대답도 아침저녁으로 색색의 알약을 삼키지 않으면 생이 위태로워지는 늙는 작부가 말한다면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가슴에 와닿겠지 잘도 들어앉던 아이를 마지막으로 떼낸 뒤로 아른 자궁에 쓸쓸한 바다를 가득 채워넣어야만 했던 늙은 작부가 말한다면, 나는 그 늙은 작부의 손을 잡고 별과 달이 취해 떨어질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늙은 작부가 마른행주로 내 눈물을 닦아주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애달픈 사랑노래를 불러달라고 칭얼거리고 싶다 젓가락 장단에 맞춰 식은 동태찌개가 제일 먼저 어깨를 들썩거릴 것이고 빈 접시와 빈 그릇들도 금시 흥이 올라 온몸을 달그락거릴 테지만 늙은 작부의 노랫소리는 인적 없는 포구의 바람소리처럼 쓸쓸하게 들리겠지 뜬금없이 나는, 선창가에 버려진 장화가 아무렇게나 신는 신발보다 오히려 쉽게 삭고 헐거워진다는 것에 새삼 놀라며 막무가내로 슬퍼지겠지 늙은 작부 또한 후렴구를 채 부르기도 전에 흐느끼겠지 그때쯤 나는 술상을 물리고 늙은 작부와 비린내가 풍기는 쪽방으로 들고 싶다 생선을 담았던 나무상자처럼 비린내 가득한 늙은 작부의 품에 나는 갓 잡아올린 도미처럼 담겨, 등허리로 바닷가 푸른 달빛이 땀을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있는 힘껏 파닥거려주고 싶다 거친 파도가 방 안 가득 들어와 철썩철썩, 철썩거리다가 곤한 잠에 빠지겠지 나는 도마위를 콧노래처럼 지나가는 칼소리나 북어포를 내려치는 방망이소리에 잠을 깨겠지 늙은 작부는 내가 북엇국을 먹는 모습 애써 보지 않는 척 담배에 불을 댕기겠지 한술 뜨고 어여 가
- 『자두나무 정류장』(창비, 2011)
홍원항은 늙은 작부다 소주 한 병 더 달라는 사내의 말을 무시한 채 욕설 가득 퍼담은 뜨거운 국밥을 넌지시 밀어놓고 담배에 불을 댕겨 무는 늙은 작부다 한때 밤마다 몇송이고 피워올리던 해당화, 잔뿌리조차 말라버린 지 오래인 음부를 가진 늙은 작부다 새벽 갯바람에 미닫이문이라도 덜컹거리면 딱히 기다리는 사람도 올 사람도 없는데 습관처럼 문을 열어보는 늙은 작부다 속 쓰린 사내들에게 꿀물을 타준 적은 뭇별처럼 많아도 정작 자신의 뒤틀리는 속을 위해서는 꿀물을 한번도 타본 적이 없는 늙은 작부다 홍원항은 늙은 작부다 극약 같은 사랑이나, 폐선처럼 쓸쓸한 세월이나,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배신이나, 막막한 쓸쓸함과 그리움이나, 어떤 말로도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들을 주저리주저리 꺼내며 나는 늙은 작부와 단둘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삼켜서는 안될 초승달을 삼켜 배앓이를 해야 했던 얘기와 대책없이 쏟아지는 압정별에 눈을 찔려 충혈되어야만 했던 얘기를 시작으로 늙은 작부와 대작하고 싶다 술을 마시다 말고 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거리면 늙은 작부는 내게 지나온 내력을 풀어내며 왜 나이를 먹을수록 쌉쌀한 음식을 좋아하게 되는지 연거푸 소주잔을 비우며 말해주겠지 자꾸 엉켜가는 혀로 엉킨 그물 같은 삶을 풀어내겠지 그러다가 늙은 작부는 한숨을 쉬듯 세월이 약이라는 식상한 말로 나를 위로하며 내 등을 아무렇지 않게 툭툭 치겠지 하지만 그렇듯 식상하고 극히 상투적인 대답도 아침저녁으로 색색의 알약을 삼키지 않으면 생이 위태로워지는 늙는 작부가 말한다면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가슴에 와닿겠지 잘도 들어앉던 아이를 마지막으로 떼낸 뒤로 아른 자궁에 쓸쓸한 바다를 가득 채워넣어야만 했던 늙은 작부가 말한다면, 나는 그 늙은 작부의 손을 잡고 별과 달이 취해 떨어질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늙은 작부가 마른행주로 내 눈물을 닦아주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애달픈 사랑노래를 불러달라고 칭얼거리고 싶다 젓가락 장단에 맞춰 식은 동태찌개가 제일 먼저 어깨를 들썩거릴 것이고 빈 접시와 빈 그릇들도 금시 흥이 올라 온몸을 달그락거릴 테지만 늙은 작부의 노랫소리는 인적 없는 포구의 바람소리처럼 쓸쓸하게 들리겠지 뜬금없이 나는, 선창가에 버려진 장화가 아무렇게나 신는 신발보다 오히려 쉽게 삭고 헐거워진다는 것에 새삼 놀라며 막무가내로 슬퍼지겠지 늙은 작부 또한 후렴구를 채 부르기도 전에 흐느끼겠지 그때쯤 나는 술상을 물리고 늙은 작부와 비린내가 풍기는 쪽방으로 들고 싶다 생선을 담았던 나무상자처럼 비린내 가득한 늙은 작부의 품에 나는 갓 잡아올린 도미처럼 담겨, 등허리로 바닷가 푸른 달빛이 땀을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있는 힘껏 파닥거려주고 싶다 거친 파도가 방 안 가득 들어와 철썩철썩, 철썩거리다가 곤한 잠에 빠지겠지 나는 도마위를 콧노래처럼 지나가는 칼소리나 북어포를 내려치는 방망이소리에 잠을 깨겠지 늙은 작부는 내가 북엇국을 먹는 모습 애써 보지 않는 척 담배에 불을 댕기겠지 한술 뜨고 어여 가
- 『자두나무 정류장』(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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