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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오래된 연인/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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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창민 조회 20회 작성일 2025-04-12 10:31:4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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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인/박철

송추 가는 길
칠순 넘어 보이는 두 노인네가 러브호텔 앞에서 서성인다
영감은 '러브체어'라고 허풍소리를 내며 펄럭이는 현수막을 한번 올려다보고
할멈은 땀내나는 손수건을 꼬옥 움켜쥐었다
서로 먼 곳을 돌아와 낯선 곳에 선 두 사람
갈 햇살 너무 고운 모양이다 부끄러운 몸짓
영감이 조용히 손짓을 하자 할멈이 그의 뒤를 따른다

송추 가는 길
5·16이 나던 그해
멀리 전북 장수에서 면회를 온 바람난 처자와 새파란 이등병이
여인숙 앞에서 서성인다 나이 어린 처자는 손가방을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전구가 해사한 방에 앉아 두 연인은 다만
송추 오는 먼짓길과
돌아갈 먼 길을 인생의 그림자처럼 길게 길게 얘기한다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세월만이 아니었다, 세월이었다
이제 홀몸이 되었으나 자식들은 모른다 지난 이야기를
늙어도 식지 않는 영혼의 풀죽을
기러기 날던 어느 날의 밤하늘을
숨차게 승강기가 올라가고 향기 짙어 깨끗한 방에
영감과 할멈이 놓여졌다
말을 잊은 두 사람
몸짓이 가벼우면서도 먼 기억처럼 느리다
할멈이 덜컥 목이 메어오는 것을 참을 때 영감이 먼저 몸을 씻었다
할멈도 냇가에서 나오듯 몸을 씻고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았다
아직 해는 중천인데
두 노인이 나란히 침대 위에 몸을 기댄 채
건너편 거울을 바라보며 잠시
서로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을 놓치기 아쉬워 그렇게 날이 지도록 앉아 있는
인연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 『불을 지펴야 겠다』(문학동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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