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규리 > 바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오늘
851
어제
667
최대
3,544
전체
297,737
  • H
  • HOME

 

[박규리] 소/박규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이창민 조회 35회 작성일 2025-04-06 22:35:00 댓글 0

본문

소/박규리

어라, 소가 시인이네
한 입의 그리움과
한 모금의 실연도
몇번은 되새김질해야 삼킬 수 있는

미련하도록 큰 배를 가졌어도
이것저것 한꺼번에 먹어치우는
재주는 없어서
한평생 같은 풀만 씹고 씹네

소는 전생에 게으른 중이었다더니
그러면 시인은 전생에 게으른 소였느냐

세상을 등지고 평생을 하루같이 산
아득한 죄로
하루에 하루를 몇번씩 겪으며
그 밤의 밤마다
수십번의 참회와 절망도 모자라서

땅땅 세상에 고삐 매인 자여!
누구도 모를 설움, 씹고 또 씹는다
순하고 죄 없는
한 그릇의 따끈따끈한 양식이 될 때까지

다른 삶은 꿈꾼 적도 없다
씹고 또 씹고
다시 뱉어 씹어 삼킬 줄밖에 모르는
오냐 소,
네가 시인이다

 - 박규리,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20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